울끈불끈 근육질에 얼굴도 곱상
“이 좋은 걸 할아버지들만 보다니…”
남성미 넘치는 씨름돌에 팬심 폭발
“씨름 선수 맞아요?”
일반적으로 알던 씨름 선수가 아니다. 씨름 선수라면 방송인 강호동처럼 100㎏이 넘는 거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탄탄한 근육질 몸에 얼굴도 곱상하다. ‘모래판 위의 짐승돌’ 이란 표현이 과한 게 아니었다.
한 동안 대중의 관심 속에서 멀어졌던 민족 전통 스포츠 씨름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계기는 1년 전 제15회 학산배 전국장사 씨름대회 대학 단체전 결승 황찬섭과 김원진의 경기 영상이었다. 10일 현재 유튜브 조회수는 221만에 달했다.
살집 있는 덩치 큰 선수가 아닌 울끈불끈 근육질의 선수가 역동적인 씨름을 펼치자 팬심이 요동쳤다. 이 영상의 베스트 댓글은 ‘이 좋은 걸 할아버지들만 보고 있었네”였다. 씨름을 몰랐던 20대 여성들도 하나같이 “씨름에 이렇게 멋있는 선수가 있었나”라며 놀라워했다.
1980~90년대를 풍미한 씨름은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씨름판의 악동’ 강호동 등 개성 강한 스타들을 발굴했다. 이만기의 천하장사 경기가 열릴 때는 오후 9시 뉴스가 뒤로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말 외환위기와 함께 프로팀이 해체되고, 너나 할 것 없이 살만 찌워 버티기에 급급한 무게 씨름에 치중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하지만 지난 1년 사이 씨름은 유튜브를 타고 뉴트로(Newtro) 열풍에 가세했다. 민족 전통 종목(Retro)에 씨름 선수라는 편견을 깨는 새로운(New) ‘씨름돌(씨름+아이돌)’이 젊은 여성 팬들을 모래판으로 끌어 모았다. 지난달 말부터는 KBS 주말 예능프로그램으로 경량급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씨름의 희열’도 방영 중이다.
흥행의 중심은 씨름 체급 중 가장 낮은 태백급(80㎏ 이하)이다.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은 황찬섭(22ㆍ연수구청)을 비롯해 허선행(20ㆍ양평군청), 손희찬(24ㆍ정읍시청), 박정우(26ㆍ의성군청) 등이 대표적인 ‘씨름돌’이다. 이들은 타 종목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남성미를 표출한다. 황찬섭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경기 중 상대의 샅바를 찢어 ‘샅찢남(샅바 찢는 남자)’ 별명을 얻었다. 허선행은 아쉽게 패하자 강한 승부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모래판 밖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였다.
황찬섭의 팀 동료 정민궁(26)은 “실전에서 종종 있지만 방송에서도 샅바를 찢는 걸 보고 정말 온 힘을 다한다는 것을 느꼈다”며 “이렇게 힘 쓸 때 두드러지는 근육과 승리 후 포효하는 모습을 볼 때 씨름 만의 남자다움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허선행은 “방송에서 표출한 감정은 진짜였다”면서 “실전은 전부 다 중요한데, 방송이라고 안일했던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화를 주체 못해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카메라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잡혔다. 이런 승부욕이 올해 장사대회에서 3위만 하다가 마지막 천하장사대회 때 태백장사에 등극한 나의 힘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요즘 씨름에 빠져드는 첫 번째 매력 포인트가 ‘씨름돌’의 넘치는 남성미였다면 두 번째는 1, 2초에 승부를 끝내는 역동적인 기술이다. 힘과 힘이 격돌하는 중량급과 달리 경량급은 가만히 버티려고만 하지 않고 서로 밀어 붙인다. 지루한 샅바 싸움도 없다. 박정우는 “찰나에 승부가 갈려 다른 투기 종목보다 좀 더 박진감이 있다”고 설명했고, 전도언(22ㆍ연수구청)은 “(중량급에 비해)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 훨씬 더 많다”고 덧붙였다.
씨름장의 풍경도 달라졌다. 젊은 여성 팬들이 찾아오고, 아이돌을 찍을 때나 볼 법한 ‘대포 카메라’가 등장했다. 선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곳곳에 보이는 것을 보며 선수들은 “씨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치솟는 인기에 황찬섭은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계약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씨름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또한 박정우는 롯데푸드의 의성마늘만두 광고를 찍었고,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도 생겼다.
선수들은 치솟는 인기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다. 허선행은 “팬들이 예전부터 있었다면 대하는 방법을 잘 알았을 텐데, 없다가 있으니까 방법을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팬들과의 단체 대화방 개설이다. 그는 “처음 단체 대화방엔 20~30명이 있었다가 지금은 70명 넘게 있다”며 “이 곳에 개인 일정을 공유하고 팬들과 소통을 한다. 팬들이 힘이 되는 말을 많이 해주고 현장에도 찾아와준다. 날 응원해주는 분들이 있어 든든하다”고 흡족해했다.
‘웃픈’ 현실이지만 씨름 경기가 열리는 현장엔 선수와 팬들 사이에 장벽이 없다. 박정우는 “선수 대기실이 따로 없으니 관중석에서 팬들과 같이 앉아 있어야 한다. 그 때 같이 사진 촬영도 한다”고 웃었다. 지방에서 대회가 열릴 때는 팬들을 초청해 식사를 하기도 한다. 전도언은 “지방에 오래 머무는 팬들이 있을 때는 팀 차원에서 팬 서비스 차원으로 한 끼 정도는 같이 식사한다”며 “점심엔 김밥을 나눠드릴 때도 있다”고 했다.
선수들은 어렵게 잡은 씨름 인기를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허선행은 “외모로 주목 받은 인기는 조금만 지나면 사그라질 것”이라며 “팬들이 관심을 줄 때 책임감을 갖고 좋은 경기력을 발휘해 계속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우 역시 “광고는 안 찍어도 되니까 씨름으로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면서 “선수의 본분을 잊지 않고 모래판에서 멋진 기량을 선보이겠다”고 약속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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