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어려운 조손 가정이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건 없고 허름한 옷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오시면 됩니다.”
지난 9월 영상 및 영화 제작자와 연기자들이 활동하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NGO의 모금 콘텐츠 제작’이란 제목으로 게시된 연기자 모집 안내문의 일부다. 선발된 연기자는 자선 단체의 후원금 모집 광고에 출연하는데 역할은 주로 다음과 같다.
#1 붕어빵과 계란빵을 파는 노점에서 반죽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있는 소녀. ‘거리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열일곱 연희’란 문구 옆에서 소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거리를 응시한다.
#2 낡은 반지하 방에 쓰레기 더미가 천장 높이까지 쌓여 있고 벽에는 시커먼 곰팡이와 거미줄이 어지럽다. 처참한 환경 속에 한 소년이 힘없이 앉아 있고, ‘오늘도 사춘기 우진이는 이곳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라는 자막이 흐른다.
#3 편의점 밖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두 어린이가 컵라면을 먹고 있다. ‘친구들보다 키도 몸집도 작은 어린 남매. 남매의 식사는 오늘도 라면입니다’ 컵라면을 먹는 어린이들의 표정은 역시 어둡다.
연기자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때론 절망과 좌절감을 몸짓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국내 자선단체들이 11일 온라인에서 진행하고 있는 주요 후원금 모금 광고의 전형이다. 대다수 자선단체는 암울한 환경에 내몰린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 동정심을 유발하는 모금 방식을 활용해 왔다. 효과가 보장되기 때문인데 후원 대상자에 대한 인권침해, 사생활 노출 문제 또한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최근에는 이 같은 비판을 피하기 위해 대역을 내세우는 것이 대세다. 실제 후원 대상자의 인권침해 피해를 방지한다는 취지지만 실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 처참한 환경을 강조하는 형식은 그대로다. 오히려 출연료를 지불하기 때문에 장소 선택과 상황 구성은 물론 연기자의 표정까지 보다 더 ‘리얼한’ 연출이 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이민영 고려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연출된 상황과 인물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미지를 한정시키고 시혜의 대상으로만 그들을 바라보게 하는 등 편견과 차별의 악순환을 유발한다”면서 “처참한 배경 속에 대역을 세우고 특정 포즈와 표정을 연출하는 등 현실을 왜곡하고 과장해 표현하는 일종의 ‘빈곤 포르노’로, 이 같은 방식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고 말했다.
‘아동 인권 보호를 위해 대역과 가명을 사용했습니다’라고 안내는 하고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아 연기자를 실제 후원 대상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안모(24)씨는 “광고에 등장하는 인물이 대역인 줄은 몰랐다. 이렇게 설정된 이미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통해 ‘아동을 동정 및 시혜의 대상이나 약자, 피해자로 묘사하지 말고 삶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자로 표현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나 강제성은 없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온라인 상에서 이런 식의 광고를 규제할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는 연말연시 기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자선단체들의 마케팅도 강화되는데 감정에 호소하며 눈물을 짜내거나 죄책감을 유발하는 방식의 광고 홍보 전략은 올바른 기부문화 형성과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며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로도 효과적으로 후원금을 유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 자선단체 관계자는 “어려운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감정적인 후원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효과가 큰 것은 사실”이라며 “방식을 다양화해 기부 열기가 식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윤소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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