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목을 베다’라는 뜻의 섬뜩한 단어 ‘참수(斬首)’가 13일 서울 한복판에서 소환, 거론됐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잔인한 인질 살해 방식이기도 한 참수가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친북 성향 및 극우 보수 단체의 집회에서였다.
먼저, 친북 성향 단체인 국민주권연대와 청년당이 종로구 미국 대사관 부근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규탄하는 ‘해리스 참수 경연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지난 9일 자신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포스터를 게시하며 해리스 대사에게 ‘문재인 종북 좌파 발언’ ‘주한미군 지원금 5배 인상 강요’ 등의 죄목을 달았다. 또한, ‘내정간섭 총독 행세’라는 죄목도 추가했는데 최근 북한이 ‘종북 좌파’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해리스 대사를 일제강점기 총독에 빗대며 맹비난한 적과 결이 같다.
다행히도 이날 ‘경연 대회’에서 실제 참수는 벌어지지 않았다. 주최측은 그 대신 해리스 대사의 사진을 찢어 ‘요리’하고 ‘묵사발’을 만드는 등 대안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찰이 참수형ㆍ화형 등을 묘사하거나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집회를 허가했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칼로 목을 베는 퍼포먼스를 감행할 경우 외교적 문제로도 번질 수 있는 만큼 경찰은 대회 내내 꼼꼼히 상황을 지켜봤다. 주최 측은 축구공에 해리스 대사의 사진을 붙인 다음 공을 발로 차는 것조차 지나치게 모욕적이라는 경찰의 지적을 받아들여 사진을 떼고 진행하기도 했다.
이날 참수 위협에 시달린 것은 해리스 대사만이 아니었다.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등 극우 보수단체들이 인근 광화문 광장에서 맞불집회 성격으로 개최한 ‘김정은 참수 경연대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까지 험한 꼴을 당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 분장한 주최측 관계자가 뿅망치를 휘둘러 김 위원장을 제압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는데 ‘나는 공산주의자’라고 쓰인 죄수복 차림의 대역 문 대통령까지 함께 응징했다. 경찰은 두 주최측간의 충돌에 대비해 경계근무를 한층 강화했다.
결국 참수 경연대회는 뿅망치와 묵사발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로 바뀌었지만 주한미국대사부터 남북 정상까지 ‘참수’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조롱받는 장면이 광장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갈수록 과격해지는 진영간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미국 대사관 주변은 오후 내내 어수선했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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