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성의 상반신이 캔버스 하나를 가득 채웠다. 4만여년 전부터 호주 땅에 살았다던 원주민이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그림 앞에 섰다. 현대 호주의 옷차림만 하고 있을 뿐 생김새, 표정, 수염까지 모든 게, 심지어는 눈빛까지 닮아 있다.
내년 2월 29일까지 부산 망미동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항명하는 광휘’란 제목으로 첫 한국 전시를 여는 작가 다니엘 보이드(37)다. 예상대로 그는 호주 원주민 출신 작가다.
그가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은 건 ‘호주 원주민’의 입장에서 발언했기 때문이다. 보이드가 내세운 개념은 ‘역사의 복수성(plurality)’. 너희가 말하는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라는, 도전적 주장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식민화되고 억압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 이야기마저 억압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보이드는 “18세기 후반 영국인들이 호주를 식민화하면서 호주 원주민의 이름은 ‘애버리지니(aborigine)’가 됐지만 이 또한 일방적 표현일 뿐”이라며 “우리와 세계의 관계는 결코 하나일 수 없다”고 말했다. 호주를 ‘발견’한 것도, 호주에 ‘진출’한 것도 아닌, 호주를 ‘식민화(colonized)’했다고 또박또박 말하는 보이드의 표현 자체가 이미 다르다.
‘역사의 복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택한 작업은 당연히 ‘식민지적 이미지의 전복’이다. 식민지배자 영국이, 새롭게 발견한 호주에 대해 기록하기 위해 만든 사진 이미지를 자신만의 기법으로 재해석해내는 것이다. 보이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해석했던 역사적 자료를 재해석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며 “영국인은 단지 과학적 자료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겠지만, 그 사진을 그림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복수성을 위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표현 기법으로는 ‘점들의 반복’을 쓴다. 흰 점을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찍어 나가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보이드에게 흰 점이란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렌즈 그 자체”다. 흰 점들을 반복적으로 찍어 나가다 보면 자연스레 검은 빈 공간이 생기는데, 이 공간은 역사 해석의 또 다른 여지를 뜻한다. 보이드는 검은 공간을 두고 “존재하지 않지만, 눈으로 검게 식별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표현할 권리가 있음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호주 원주민 작가라는 이유로 자신이 수행한 역사적 전복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할 뜻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 작가에게 ‘과거를 되돌이켜본다’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는 “우리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그리고 오해(misunderstanding)의 여지가 있음에도 과거와 계속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동시에 그런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자신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지배적 역사관에 대한 문제 의식은 보이드 작품 인기의 원천이다. 런던자연사박물관, 호주 내셔널갤러리가 작품을 사들이더니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하기도 했다.
보이드는 ‘다름’에 대한 긍정을 강조했다. “세계가 글로벌화되면서 많은 다양성이 발생했지요. 전 세계를 둘러봐도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부산=이정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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