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화 ‘더 킹 : 헨리 5세’를 관람했다. 이 영화는 자유롭게 살아가던 왕자 ‘할’이 왕좌에 올라 역대 잉글랜드 국왕 중 손에 꼽히는 최고의 왕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이지만 처음으로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 상영에 성공했다. 헨리 5세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 정복에 나서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그 전투 장면이 영화에서 생생하게 재현됐다. 이 전투에서 헨리 5세는 비 오는 날을 기다려 경무장으로 속도와 이동성을 극대화한 가운데 중무장한 프랑스의 마병을 진흙탕으로 유인하여 초토화시켰다. 아군의 약점을 강점으로, 적의 강점을 약점으로 만든 탁월한 전략이 프랑스 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면적이 세계 107위에 불과하고 자원도 부족하지만 인구는 세계 28위, 국내 총생산(GDP)은 세계 10위를 자랑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이다. 수출 중심의 경제로 압축적인 성장을 경험했고, IT 강국을 넘어 한류를 수출하는 문화 강국을 꿈꾸고 있기도 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 등 우리나라 제조기업의 브랜드를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온라인 게임은 종주국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으며 네이버가 만든 메신저 라인은 글로벌 이용자 수가 1억6,000만명을 넘어섰다. 아이돌 그룹 BTS는 이미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한 아티스트로 자리를 잡았고, 봉준호 감독의 최근 영화 ‘기생충’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손흥민 선수나 미국 메이저 리그의 류현진 선수는 이미 아시아 수준을 뛰어넘는 업적과 실력을 입증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처럼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뛰어난 관료도 있다. 우리나라가 배출한 세계적인 기업이나 예술인 또는 운동선수들은 모두 국내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외의 유력한 경쟁자들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을 우리나라의 대학이나 학계로 돌려보면 상당히 실망스러운 현실을 접하게 된다. 우선 세계적인 대학이라고 자랑할 만한 대학이 없다. 여기저기서 발표하는 랭킹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 대학 랭킹에서 세계 10위권에 포함된 국내 대학은 하나도 없다. 아시아 대학 랭킹에서도 일본이나 중국의 대학은 물론, 싱가포르나 홍콩의 대학에도 밀리고 있는 현실이다.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의 경우 QS 세계대학 2019년 평가에서 세계 37위, 아시아 11위를 기록했고 US News & World Report의 2019년 대학평가에서는 세계 128위, 아시아 12위를 기록했다. 분야별로 훌륭한 학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지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2015년에 서울공대가 ‘201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백서(부제: 좋은 대학을 넘어 탁월한 대학으로)’를 발간하면서 만루홈런은 치지 못하고 번트에 만족하는 국내 대학이나 학자의 현실을 스스로 반성했지만 이후에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하지만 대학도 학자도 세계적인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투입되는 자원이나 인재 그리고 성과 측면에서 고립되고 밀리면 미래의 지속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최소한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대학이나 학자의 수준이 올라가야 우리나라 학문의 미래도 국가의 미래도 보장된다.
비록 정부가 예산과 감사를 무기로 입시, 등록금 등 대학운영의 전반을 규제하고 대학 자체의 재정이 취약하며 대학 구성원의 전반적인 혁신의지가 박약한 상황이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부디 새해에는 우리 대학의 약점을 강점으로, 해외 대학의 강점을 약점으로 만드는 탁월한 전략이 도출되기를 기대한다.
김성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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