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시 경제 상황에 대응할 (금리 인하) 여력은 아직 남아 있다.”(10월16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지난 10월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2년 만에 사상 최저치(연 1.25%)로 되돌아갔다. 7월에 이은 올해 두 번째 금리 인하 조치였다. 2008년 이래 14차례, 총 4%포인트(연 5.25→1.25%)의 기준금리 인하로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에 맞섰던 한은의 ‘긴축 시대’가 단 두 번(2017, 18년)의 금리 인상을 끝으로 종료된 셈이다. 더구나 이 총재의 발언처럼 내년에도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 사상 초유의 기준금리 1% 시대가 열릴 판국이다. 저금리가 우리 경제의 ‘뉴노멀’이 될 거란 전망이 갈수록 강화되는 이유다.
저금리는 대출이 많은 가계의 이자 부담은 줄여줬지만, 이자로 생활하는 은퇴자는 물론 노후자금 마련이 절실한 40, 50대와 자산을 늘려야 하는 20, 30대 모두를 곤경에 빠트렸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자금이 부동산이나 고위험 투자상품으로 쏠리면서 저금리의 경기부양 효과도 떨어지고 있다.
◇역대급 초저금리에 투자처 사라져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415조원이던 5대 시중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올해 446조원(11월 말 기준)으로 30조원 이상 증가했다. 저금리 기조에 따라 시중 유동성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다. 특히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로 내려간 직후인 11월엔 올해 들어 월간 두 번째로 많은 12조원이 유입됐다.
유동성은 넘치고 이자율은 낮은 현 상황은 투자자들의 성향을 공격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은행 예적금이 지급하는 이자는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로 따졌을 때 제자리걸음 또는 마이너스에 가깝기 때문이다. 저축 상품들이 재테크 수단으로서 제 역할을 못하다 보니 투자자금은 주식, 고위험 채권, 사모펀드 등 고수익 상품 전반으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파생상품을 포함한 사모펀드 시장이 해를 거듭할수록 급성장 중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5년 200조원 수준이던 사모펀드 시장 규모는 올해 400조원으로 2배 급증했다. 정부가 규제 완화로 시장 활성화를 도모한 측면이 크지만, 고위험을 감수하는 투자자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험투자가 보편화하면서 부작용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최근 대규모 투자 손실이 발생한 파생결합펀드(DLF) 사태가 대표적이다. DLF는 해외 국채의 금리 변동에 수익률이 연동되는 고위험 사모펀드였지만 이를 판매하는 은행 직원도, 가입하는 투자자도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사태 발생 직후 부랴부랴 은행권의 고위험 상품 판매를 금지하는 고강도 대책을 마련했지만, 되레 저금리 시대에 투자자 선택권을 제한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부동산과 해외로 흘러가는 돈
국내 금리가 ‘초우량국’ 미국보다도 낮다 보니 해외 투자처로 빠져나가는 자금이 급속히 늘고 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올해 1~9월 내국인의 해외투자(주식+채권+대출) 자금은 514억달러로, 지난해 연간 투자액(623억달러)의 83%에 육박했다. 2013~15년 연 500억달러 초반대였던 내국인 해외투자는 2016년 663억달러, 2017년 838억달러 등으로 급증세가 지속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 2015년 말부터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미국 금리상품 수익률이 우리보다 되레 높은 내외금리 역전 현상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증시가 2017년부터 본격화한 호황 국면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해외 투자를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외투자 비율은 3.6%로 일본(5.2%)에는 못 미치지만 유로존(2.7%), 미국(1.5%), 중국(1.0%)을 크게 앞섰다.
무엇보다 부동산에 여전히 돈이 몰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우리나라 전체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830조원으로, 2018년 말(808조원)보다 22조원가량 늘었다. 특히 올해 전 분기 대비 주택담보대출 증가 규모는 1분기 4조3,000억원, 2분기 8조4,000억원, 3분기 9조5,000억원으로 점차 커지는 추세다.
◇성장에 보탬 안 되는 금융
넘쳐나는 시중자금은 좀처럼 생산성 높은 부문에 투입되지 않는 형국이다. 올해 3분기 기업대출 증가분(전년동기 대비) 20조5,000억원 중 13조2,000억원이 도소매업(+4조9,000억원), 숙박·음식점업(+1조5,000억원), 부동산업(+6조8,000억원)에서 발생했다. 새로 늘어난 기업대출의 64%가량이 영세자영업자(도소매, 숙박ㆍ음식)나 임대사업자(부동산) 비중이 높은 부문으로 흘러든 것이다. 더구나 늘어난 기업대출 가운데 기계ㆍ장비 등 설비투자에 들어간 시설자금은 3분의 1(6조2,000억원)이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운영비를 비롯한 운전자금에 들어갔다.
한은의 연속 금리 인하에도 돈은 제대로 돌지 않는 상황이다. 통화 1단위가 상품ㆍ서비스를 생산하는데 몇 번이나 쓰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화폐유통속도는 올해 들어 사상 최저 수준(1분기 0.68, 2분기 0.69) 수준으로 떨어졌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시중통화량(M2)으로 나눠 구하는 이 지수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0.95 안팎이었다. 2분기 중 가계(비영리단체 포함) 여윳돈(순자금운용)이 대부분 현금이나 예금성 자산 형태로 전년동기 대비 13조원가량 늘어난 점도 시중자금 증가가 좀처럼 소비나 투자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