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돌림 라이프 스타일의 전성시대다. ‘혼밥(혼자 먹는 밥)’에서 시작하더니 이내 ‘혼술(혼자 마시는 술)’, ‘혼영(혼자 보는 영화)’, ‘혼행(혼자 떠나는 여행)’ 등으로 번져나갔다.
연말이면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송년회 등 각종 모임이 릴레이처럼 이어지면서 혼자 있고 싶은 욕구는 빠르게 치솟는다. 홀로 있는 시간은 사투 끝에 얻어내야 하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나 홀로 연말족(族)’은 집 안에 틀어박히지 않는다. TV채널만 하염없이 돌리며 방구석을 벅벅 긁고 있기에는 승리가 너무 값지다.
당당하게 집 밖을 향한다. 혼자여도 좋은 공간에서, 혼자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린다. 빅데이터 전문기업 다음소프트의 박현영 생활변화관측소장은 “예전부터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갈망했는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이 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요즘에는 혼자라는 것을 존중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고,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생겨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혼자만의 완벽한 휴식
혼자 있는 시간의 목표는 완벽한 휴식이다. 이달 초 서울 통의동의 ‘보안1942’에 혼자 1박한 직장인 김유란(31)씨는 “집이 아닌 특별한 공간에서 혼자 머무르는 것은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는 것과 같다”며 “한해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제게 연말에 주는 보너스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부터 2박3일간 혼자 충남 아산 온양온천에서 시간을 보낸 직장인 이승연(24)씨도 “무조건 쉬는 게 목표”라며 “좋아하는 반신욕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보고 싶은 책을 읽을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는 반신욕을 할 때 쓸 요긴한 바디용품들, 자축하기 위한 케이크와 샴페인, 책과 좋아하는 음원 등을 준비해서 갔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처지라 집에서도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그는 “집에서는 완벽하게 쉴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이씨는 “집에 있을 땐 눈만 돌리면 청소나 정리정돈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며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편하게 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 누하동의 한옥 숙소 ‘누와’에서 이달 초 1박2일을 홀로 보낸 직장인 변진혁(34)씨는 하루 종일 인근 편의점을 제외하고는 숙소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누와는 서울 도심 한복판이지만 서촌의 조용한 주택가 좁은 골목 깊은 곳에 있다. 그는 “주변의 방해 없이 온전히 혼자 쉬려고 머물렀다”라며 “집에서는 아무리 편하게 있어도 뭘 먹을지 고민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심지어 TV를 보더라도 무엇을 봐야 하는지 고민해야 해서 쉬어도 진정으로 쉬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숙소에는 TV가 없는 대신 숙면을 돕는 침구와 발을 담글 수 있는 욕조,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하는 큰 창 등이 있다. 그는 혼자 숙소에 있으면서 미리 챙겨간 와인을 마시고, 늦게까지 천천히 음악을 들었다. 끼니는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그는 “특별한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면 늘 듣던 노래도 색다르게 다가온다”라며 “그러면서 올 한해 어떤 일이 좋았고, 힘들었고, 내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유롭게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서울 창경궁 맞은편 권농동의 한옥 공간인 ‘틈’에서 하룻밤을 홀로 보낸 이도희(25)씨도 한옥에서 올 한해 뜻 깊었던 일을 정리하고, 내년 계획을 세우면서 ‘나 홀로 종무식’을 했다. 축제기획 관련 업무를 하는 그는 그간 했던 행사들을 목록으로 정리하고, 그에 따른 감상을 남겼다. 그는 “그냥 먹고 자고 하면서 쉬는 게 아니라 천천히 생각하고, 정리를 하면서 보내는 휴식 시간이었다”라며 “이런 공간에 오지 않았으면 다른 일에 치어 그냥 시간이 흘러갔을 텐데, 내 스스로 종무식을 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혼자 제주에서 일주일을 보낸 학원강사 김순라(33)씨는 “제주는 혼자 하기에 교통 등 편의시설이 잘 돼 있고, 혼자서도 즐길 거리가 충분하다”라며 “연말에 북적대는 도시보다는 조용한 휴양지에서 나를 위한 휴식을 취하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제주 오름을 돌면서 일출을 보고 하루 종일 사진을 찍었다.
일몰과 함께 숙소로 돌아와서는 사진을 정리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혼자 제주의 한 유명 박물관에 들렀다가, 전시 체험 공간을 오롯이 홀로 즐길 수 있었던 기쁨도 잊지 못할 순간이다. 그는 “보통 박물관에 가면 사람들에 치어서 제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없는데, 혼자 가니깐 혼자 체험할 수 있게 해줘 사진도 잘 찍을 수 있고, 감상도 제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2인 기준 비용은 부담, 주위 시선도 곱지 않아
연말에 혼자 있는 시간은 ‘자발적인 고립’이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2인 기준의 숙박비를 받거나 유명 맛집에서 2인분으로 음식을 주문해야 할 때가 대표적이다. 1박에 14만원하는 숙소에서 묵은 이승연씨는 “보통 2인 기준이어서 혼자 가더라도 2인 숙박비를 내야 한다”라며 “조식도 2인 기준으로 할인하기 때문에 혼자 가면 아무래도 친구들과 갈 때보다 비용이 더 든다”고 했다.
자유를 얻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김순라씨도 “다양한 음식을 조금씩 맛보고 싶거나, 전골이나 고기 등 푸짐하게 먹는 메뉴를 먹을 때는 혼자여서 아쉽다”라며 “주로 국밥, 비빔밥, 찌개 등 1인 메뉴 위주로 먹는다”고 말했다.
주위 시선도 따갑다. 혼자 머무는 숙소를 찾을 때 무인 체크인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승연씨는 “아무래도 여자 혼자 왔다고 하면, 아직까지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들이 있다”라며 “혼자여서 충분히 즐거운데, 뒤에서 ‘저 사람 무슨 사연 있나 봐’라는 수군거림을 들을 때면 괜히 위축된다”고 했다.
김순라씨도 “밤에 맥주 한잔 하려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라며 “웬만하면 숙소 안에서 뭐든 해결하고, 먹는 것은 이왕이면 취향에 맞게 미리 챙겨가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혼자 머물다 보니 보안 문제도 특별히 신경이 쓰인다. 세 칸 한옥에 홀로 머물렀던 이도희씨는 “낯설어서 좋지만 저녁이 되면 무서울 때가 있다”라며 “숙소를 알아볼 때 너무 외지지 않게 안전한 곳을 찾는다”고 했다. 제주의 동쪽인 서귀포 성산읍에 위치한 ‘플레이스 캠프’에 머문 김순라씨는 “숙소 주변에는 편의시설이 없지만 숙소 내에 보안이 철저하고, 밤늦게까지 카페나 주점이 있어 안심이 된다”라며 “혼자 편안하게 있으려면 보안이나 안전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상의 소중함과 성취감 얻어
‘나 홀로 연말족(族)’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숨 고르기에 가깝다. 혼자 있는 시간은 이들을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변진혁씨는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재미있는 생각이 들거나, 좋은 것을 보고 경험해도 말할 이가 없다”라며 “혼자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럿이 같이 해야 더 재미있다라는 생각이 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혼자 있으면서 올 한 해를 돌아봤다는 이도희씨는 “지난 한 해 고생 많았구나 하고 저를 칭찬하고, 한 해 동안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각성해야 할 부분들도 보였다”라며 “내년에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잠깐 몸을 낮추고 쉬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승연씨도 “회사뿐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하루 종일 끊임없이 누군가와 부대끼는데, 이렇게 혼자 있다 보면 다시 그들과 부대끼고 싶어진다”라며 “혼자 있는 시간이 관계의 균형을 맞춰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혼자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은 의외의 성취감도 준다. 지난해 경주에 이어 올해도 혼자 여행을 한 이도희씨는 “혼자 집 밖이 아닌 어디엔가 머무는 것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며 “가기 전에는 쉬워 보이지만 막상 다녀오면 ‘와 내가 해냈다’라는 성취감이 솟아난다”고 말했다. 물질적인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 가치들도 경험할 수 있다. “먹고 마시는 송년회 대신 연말에 혼자 시간을 보내면 가슴 깊숙한 충족감을 준다.”(김순라)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 나를 둘러싼 사회와 나를 분리하면 평소에 보고 느낄 수 없었던 감정과 생각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게 만들어준다.”(변진혁)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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