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20년만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최근 ‘중동의 최대 중재자’로 급부상한 러시아에 대한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평가다. 러시아의 전통적 경쟁국인 미국이 탄핵 사태로 혼란스럽고, 또 다른 경쟁 상대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의 핵심축 영국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휘청대는 사이 러시아만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올해 푸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립주의’로 힘의 공백이 생긴 중동지역을 종횡무진 누볐다. 미국의 시리아 철군 이후 터키와 손잡고 시리아 북부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 10월에는 미국의 전통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12년만에 방문해 “전례 없는 파트너십”을 공언했다. 당시 양국 간 20억달러 규모의 경제 거래가 성사됐고, 사우디는 미국ㆍ터키 관계 악화의 요인이었던 러시아의 대공방어시스템 S-400 구매에 관심을 표했다. 미국의 또 다른 동맹 이집트도 지난 3월 러시아 전투기 수호이(Su)-35의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중동의 지정학적 패권이 미국에서 러시아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 경제는 규모 면에서 세계 10위권에도 못 미치고, 올해 경제성장률도 1% 남짓에 불과하다. 문화 등 소프트파워 면에서도 서방에 한참 밀린다. 그러나 이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스트롱맨 리더십’과 권모술수가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NYT는 분석했다. 오랜 기간 푸틴의 참모였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전 대외경제담당 부총리는 “러시아는 ‘선택지의 환상’ 대신 단 한 명의 ‘지도자의 의지’에 기대어 미래를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는 가짜 뉴스나 음모론 등 러시아식 ‘독재 정치술’의 확산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의혹인 ‘러시아 스캔들’이 불거진 이후 올해 유럽의회 선거나 영국 총선 등에서는 ‘러시아 경계령’이 내려졌었다. 자신감이 부쩍 상승한 푸틴은 지난 6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미국ㆍ유럽 내 국가주의 포퓰리즘의 발흥을 두고 “(서방의) 자유주의적 이상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까지 말했다.
크림반도를 포함해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는 러시아의 야심도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지난해 5월 크림반도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차량용 교량인 케르치 대교를 일방적으로 건설하더니 최근엔 바로 옆에 열차용 철교까지 세웠다. 케르치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이 같은 조치로 우크라이나 선박들은 발이 묶일 수도 있는 처지다. EU까지 나서서 우크라이나의 주권ㆍ영토침해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하지만 러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러시아가 세를 불리면서 서방의 우려도 커지고 있지만, 자칫 미국과 유럽 동맹국 간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최근 2020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을 통해 독일ㆍ러시아 사이에 건설중인 가스관 사업에 참여한 서방기업들을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이 러시아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앞세웠지만, 독일은 ‘내정 간섭’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 사업에 프랑스ㆍ오스트리아 등 다른 나토 회원국들도 참여하고 있어 미국과 유럽 간 대치 전선은 확대될 수도 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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