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현대 상업예술가 앤디 워홀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물질적 풍요로움을 구가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생산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의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가 가능해지고 생산의 한계비용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제적 효율성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림의 생산과정을 보자. 가령 같은 그림을 더 그리게 되는 경우, 처음에 그림을 구상하는 단계를 제외한다면 추가적으로 한 점 그리는 데에 들어가는 투입물(화가의 노동력, 물감의 양, 캔버스의 크기 등)의 규모는 동일할 것이다. 그림의 생산과정에서 추가적으로 재생산을 하는데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의 투입을 줄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업예술의 선구자 크라나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대량 제작 방식으로 생산하고 이를 통해서 상업적 수익을 얻은 화가는 누가 있을까? 미술사적으로 먼저 꼽을 사람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일 것이다. 독일 작센의 궁정화가로 독특한 관능미를 지닌 ‘루크레티아(Lucretia)’ 등의 대표작을 남긴 그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공방에서 그림을 제작했다. 주문이 밀리면 여러 작품을 빠른 시간에 그려야 했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라나흐가 즐겨 그렸던 비너스 그림 가운데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이 꽤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효율적인 분업에 기반한 대량 생산으로 고객들이 원하는 날짜에 맞추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던 그의 작업실은 일종의 가내수공업장이었다.
그는 생산뿐 아니라 그림을 주문하는 수요자 즉, 고객을 관리하는 데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그의 고객에는 카톨릭계의 군주와 귀족은 물론이고 신교도 측의 상인과 시민계급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구교와 신교의 세력다툼 와중에서도 주문을 꾸준히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 한쪽이 힘이 기울어 주문이 줄어들더라도 다른 쪽에서 주문이 늘어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수요 계층에 대한 일종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한 셈이다.
현대 미술에서 상업적으로 그림을 대량 생산한 화가로는 단연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을 꼽을 수 있겠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의 팝아트(Pop art)는 가벼운 대중예술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장르로 자리잡았는데, 1950년대 이후 등장한 수많은 팝아트 작가 가운데 대중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팝아트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화가로는 앤디 워홀과 뉴욕 출신인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을 들 수 있다.
우리에게 ‘행복한 눈물’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리히텐슈타인의 제작 양식은 아주 간결하다. 그는 오래된 만화같이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소재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만화의 형식, 주제, 기법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였다. 워홀과 마찬가지로, 그림 소재가 대중에게 얼마나 익숙한 이미지인가가 리히텐슈타인에게 중요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선명한 검은색 테두리와 더불어 옛 신문 속 사진처럼 형태를 메우고 있는 망점들이다. 인쇄기술자였던 벤자민 데이의 이름을 딴 ‘벤데이 점(Ben-Day Dots)’라는 기법을 이용한 것으로, 일률적으로 구멍이 뚫린 판을 사용하여 색점(色點)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방식이다. 그는 직접 드로잉하고 채색하는 대신 구멍을 채우는, 기계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법을 택했던 것이다.
◇ “돈을 벌어야 진정한 예술”
앤디 워홀은 1928년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으며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광고물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대중잡지에 삽화를 그리며 상업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그 후 그는 가수나 영화배우 같은 유명인,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재키 케네디 등을 작품 소재로 삼았고, 그들의 대중적 이미지를 판화기법 가운데 하나인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실크스크린은 보통 광고전단 등을 제작하는 인쇄기법으로, 순수미술보다는 상업미술에서 사용된다. 워홀의 많은 그림에서 이미지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걸 보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인쇄물 제작 기법을 썼기 때문이다.
워홀은 실크스크린 공장을 세운 뒤 조수를 두고 작업 지시서를 통해서 작품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마치 공장에서 획일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하듯이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생산된 작품에 사인을 해서 판매하며 “예술은 비즈니스”라고 공공연하게 표명했다. 이처럼 그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예술가나 화가는 아니었다. 상품 생산을 하는 비즈니스맨처럼 작품을 만들었고 실제로 스스로의 작품을 ‘비즈니스 아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업예술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워홀은 자신이 말했듯이 최초의 ‘상업 예술가’였다. 진정한 자본주의 예술가로서 그는 “돈을 버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워홀이 규정한 상업예술의 미술사적 의의는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중적 이미지의 기계적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워홀의 작품은 표피적이고 무감각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대량소비사회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워홀은 자신이 즐겨 먹던 수프 깡통, 만화 한 컷, 신문 보도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를 캔버스에 전사(傳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당시의 대량소비 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한 것이다. 또한 워홀은 처음부터 팔릴 만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미 수요가 많고 잘 알려진 대중문화를 활용한 작품보다 더 잘 팔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문화 불모지 미국에 팝아트 꽃핀 이유
워홀이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까지에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신흥 경제대국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미국은 유럽에 비해서 문화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문화적 콤플렉스는 자국에 새로운 문화의 뿌리를 내리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을 터이고, 이것이 바로 예술의 대량 생산과 대중적 향유가 가능한 팝아트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또한 미국의 대량 생산적 자본주의의 맥락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이 같은 팝아트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것이며 미국적인 ‘문화 만들기’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 미국에서 워홀의 작품들은 이 나라 문화정책에 딱 알맞은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워홀의 작품 중에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 중에 ‘청록색 마릴린(Turquoise Marilyn)’으로 알려진 작품으로, 전세계적으로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었던 2007년 예술품 수집광이자 헤지펀드계의 거물인 스티븐 코언이 8,000만 달러에 구입했다.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고 미술시장도 침체되었으나 2011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앤디 워홀의 첫 자화상이 그의 자화상으로는 사상 최고가인 3,844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이 푸른색 계열의 자화상은 1963년부터 196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선글라스를 쓰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워홀을 실크스크린으로 네 개의 패널에 담아낸 작품이다.
그의 작품 중 특히 2면화로 제작된 ‘마릴린 먼로 제단화(Marylin Diptych)’(1962)를 보면 워홀의 대중문화에 대한 역설적인 상징을 읽을 수 있다. 원래 2면화 혹은 3면화는 중세 때부터 제단화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1962년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워홀은 의도적으로 성상(icon)을 제작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릴린 먼로의 두 폭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왼편은 마릴린 먼로의 삶을, 오른편을 죽음을 뜻하며 오른쪽으로 갈수록 희미해지도록 하여 그녀의 죽음을 표현했다. 그가 이 제단화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릴린 먼로라는 대중적 스타는 현대의 성인(聖人) 반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는 역설적 주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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