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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같은 왕 섬겼던 스페인-포르투갈, 가까이하기엔 국경이 너무 길었다?

입력
2020.01.04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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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7년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프로이센을 상대로 한 오스트리아의 영토 수복전으로 시작된 7년전쟁(1756~1783)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이 대거 개입한 ‘18세기판 세계대전’으로 번지며 당대 세계질서를 새로 개편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 초기인 1757년 오스트리아군이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군을 처음 격파하며 전세를 회복했던 콜린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 ⓒ위키피디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한 오스트리아의 영토 수복전으로 시작된 7년전쟁(1756~1783)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이 대거 개입한 ‘18세기판 세계대전’으로 번지며 당대 세계질서를 새로 개편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 초기인 1757년 오스트리아군이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군을 처음 격파하며 전세를 회복했던 콜린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 ⓒ위키피디아

1762년 5월 5일, 2만2,000명의 스페인군은 포르투갈 국경을 넘어 진군했다. 5일 전이었던 4월 30일 소규모 부대가 포르투갈의 트라스우스몽테스에 나타나 포고문을 붙이고 사라진 일의 후속 행동이었다. 포고문은 “스페인은 포르투갈인의 친구로서 영국에 의해 채워진 족쇄를 풀어주겠노라”고 선언했다. 포르투갈은 5월 18일, 스페인과 스페인의 배후인 프랑스 두 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인접국 전쟁, 세계대전으로 번지다 

1756년에 시작된 7년전쟁은 현재의 폴란드 영토인 슐레지엔을 되찾고 싶은 오스트리아와 내줄 생각이 없는 프로이센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전세계를 놓고 사사건건 부딪히던 영국과 프랑스는 각기 다른 쪽과 손을 잡았다. 떠오르는 신흥세력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편을 들자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로이센 편을 들었다. 프로이센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러시아와 스웨덴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의 반대편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유럽 국가들이 지저분하게 맺은 여러 동맹과 조약은 전쟁을 확산시키는 한 가지 요인이었다. 1761년 프로이센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영국은 프랑스의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1762년 1월 4일 스페인에게 더럭 선전포고했다. 이른바 가족동맹으로 맺어진 프랑스의 우방 스페인에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처음부터 끼어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영국의 도발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스페인은 1월 18일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응수했다.

포르투갈과 영국의 역사적 관계는 대체로 좋은 쪽이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의 강적인 프랑스와 스페인을 견제할 세력으로서 포르투갈이 필요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도 상대하기 버거운 스페인을 상대하려면 영국과의 동맹이 도움이 됐다. 14세기에 시작된 양국의 동맹 관계는 7년전쟁 때까지도 주욱 이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그보다 복잡했다. 12세기 이베리아반도에서 생겨난 포르투갈은 자국 영토의 무어인을 13세기 중반까지 완전히 물리쳤다. 카스틸리야와 아라곤의 두 왕국이 결합한 스페인은 16세기 초에야 단일한 정치체제를 갖췄다. 1580년 포르투갈 왕 헨리가 후사 없이 죽자 스페인 왕 필립2세가 전쟁 끝에 1581년 포르투갈 왕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한 명의 왕이 통치하는 이른바 ‘이베리아연방’의 구성요소로 간주됐다. 스페인의 일부로 흡수되고 싶지 않았던 포르투갈인들은 전쟁을 벌여 1640년 다시 독립했다.

 ◇국경 길이와 전쟁 관계 연구, 프랙털을 낳다 

한때나마 같은 왕을 가졌고 이슬람을 배격하는 역사를 공유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결정적인 제약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국가간의 관계에서 이웃은 친구기보다는 적인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국경을 공유하는 두 국가 치고 전쟁을 벌여본 적이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절대 싸울 것 같지 않은 미국과 캐나다도 1812년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에 한 차례 전쟁을 치렀다.

다방면에 족적을 남긴 루이스 리처드슨은 전쟁의 수학적 분석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가 가졌던 질문 중 하나는 ‘두 나라가 마주한 국경의 길이가 길수록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아질까’였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는 여러 나라의 국경 길이와 전쟁 빈도를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이 리처드슨의 눈에 띄었다. 국경의 길이는 자료마다 제각각이었다. 리처드슨은 처음에는 단순한 오차라고 생각했다. 자료를 모을수록 단순한 오차로 치부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동일 시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경 길이가 어느 자료에서는 987㎞, 다른 자료에서는 1,214㎞였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23%의 차이는 측정 오류로 치부할 수준을 넘어섰다.

리처드슨은 우선 국경의 길이를 정밀하게 재려고 시도했다. 단위가 큰 자를 가지고 측정한 후 측정단위를 줄여나가면 길이가 조금씩 커지다가 정밀한 값으로 수렴하리라 짐작했다. 리처드슨은 자신의 짐작이 틀렸음을 발견했다. 단위가 줄어들면 길이가 늘어남은 사실이었지만 특정한 값으로 수렴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늘어날 뿐이었다. 리처드슨은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관찰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진짜 혁신적인 생각이 늘 그러하듯 리처드슨의 관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리처드슨 이상으로 다방면에 관심이 있었던 브누아 망델브로였다. 리처드슨의 논문을 읽고 영감을 얻은 망델브로는 이를 일반화한 ‘프랙털(fractal)’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망델브로는 주식과 같은 금융자산의 가격 변동이 얌전한 무작위가 아니라 이른바 ‘격렬한 무작위’임을 발견하기도 했다. 격렬하게 무작위한 대상을 경제학이 흔히 가정하는 정규분포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었다.

리처드슨이 애초에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은 불분명했다. 국경 길이와 전쟁 확률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질문 자체에 내재된 또 다른 문제는 어떤 규모의 무력 분쟁까지 전쟁으로 보느냐였다. 리처드슨은 인명 피해로 측정된 전쟁의 규모가 멱법칙을 따름을 발견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의 사상자 수가 1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열 배 증가하면 그 발생 빈도는 대략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를 달리 이해하면 1,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이 셋 정도 되면 이제 손실이 1억 명에서 10억 명 사이인 전쟁이 한번쯤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린 포르투갈의 분전 

포르투갈은 7년전쟁 내내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영국의 동맹국이긴 했지만 자국 영해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해전 때 바다에 빠진 양국 수병 모두를 공평하게 구조했다. 전세가 유리해지자 프랑스는 영국을 보다 강하게 압박하는 차원에서 스페인의 참전과 포르투갈의 편입을 계획했다. 1762년 4월 스페인과 프랑스는 포르투갈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영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하라는 요구였다.

포르투갈이 어떻게든 전쟁을 회피해보려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755년 11월 1일, 진도 8.5에서 9로 추정되는 지진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앞 바다에서 발생했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리스본에서만 사망자가 10만 명 가까이 발생했다. 워낙 물질적, 경제적 피해가 컸던 나머지 월급을 받지 못한 포르투갈군은 자국 민간인을 약탈하며 연명하는 강도떼로 돌변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포르투갈의 이러한 어려움을 종교적 이단인 영국과 손잡은 데 대한 천벌이라고 여겼다.

전쟁 초반의 전세는 스페인군에게 상당히 유리했다. 시세의 두 배를 치르고 식량을 사들이는 스페인군에게 포르투갈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식량을 현지에서 모두 조달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스페인군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징발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먹을 것을 빼앗기자 포르투갈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게릴라전과 가져다 쓸 만한 물건을 남기지 않는 청야전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포르투갈 농민군은 2만2,000명의 스페인군에게 8,000명의 손실을 입혔다. 잔존 스페인군은 1762년 6월말 스페인으로 후퇴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3만 명의 스페인군은 1만2,000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7월 포르투갈 동부의 베이라를 침공했다. 이에 맞서는 포르투갈군 병력은 8,000명에 불과했고, 지원군으로 와있던 영국군도 7,000명이 전부였다. 압도적인 병력 차로 인해 초반에는 스페인-프랑스동맹군이 거듭 승리를 거뒀다. 그렇지만 포르투갈 영토 깊숙이 들어오자 지난 6월의 양상이 반복됐다. 11월까지 1만5,000명을 잃은 스페인군은 심지어 카스텔로 브랑코에 있던 파견군 본부마저 유린되고 말았다. 스페인군은 한 차례 더 포르투갈 남동부의 알렌테주를 침공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포르투갈군이 스페인 영토를 급습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급해진 스페인은 11월말 아무런 소득없이 전쟁을 끝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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