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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대정전 계기로 민간서 달러 유통… 시장 활기 대반전

입력
2020.01.02 04:4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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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사회, 신음하는 지구촌] 1부 <2> 식물정부 역설, 경기가 살아난다

블랙아웃으로 카드 결제 중단되자 달러 거래, 마두로 정권은 묵인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없음에도 베네수엘라 국민 500만명 안팎이 나라를 등진 건 심각한 치안불안과 함께 국가경제 붕괴에 따른 식량, 의약품 등 생필품 부족 때문이다. 실제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많은 서방 언론들은 “장기적인 경제 붕괴로 식량, 식수, 전력이 크게 부족해 인구 3,000만명 중 10% 이상이 굶주림을 피해 나라를 탈출했다”고 보도해왔다. 하지만 기자가 지난달 10~14일 찾은 베네수엘라의 실제 모습은 달랐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도 아랑곳없이 시장에는 물건들과 달러화가 넘쳐났다. 마두로 정권이 경제를 포기ㆍ방관하고 암달러 유통을 허용하자 역설적으로 민간의 자생적 힘으로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평이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전자제품전문 상가 다카(DAKA)에 상품들이 달러화 가격표가 붙은 채 진열돼 있다. 카라카스=이대혁 기자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전자제품전문 상가 다카(DAKA)에 상품들이 달러화 가격표가 붙은 채 진열돼 있다. 카라카스=이대혁 기자

◇달러 가격표 붙은 넘치는 상품들

지난달 11일 오후 수도 카라카스 리우데자네이루 거리의 전자제품 전문 상가 다카(DAKA). 입구에 들어서자 판매원과 고객 40여명이 곳곳에서 제품을 놓고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삼성, LG 등 낯익은 상표가 눈에 띄었다. TV, 냉장고, 에어컨, 다리미, 이어폰 등 온갖 전자제품이 전시돼 있었고, 포장된 채 쌓여 있는 제품들도 즐비했다. 눈에 띄는 것은 가격표였다. 삼성 냉장고 1,689달러, TV 1,589달러 등 모두 미국 달러로 판매되고 있었다.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이 7달러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높은 금액임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1999~2013년)부터 베네수엘라는 가격통제로 유명했던 나라다. 상인들은 가격 인상을 당국 허가를 받아야 했고, 함부로 가격을 올렸다가는 세무조사, 물품 압수 등의 철퇴가 가해졌다. 현지 통역은 “5~6년전 이곳 다카 매장이 가격을 올렸다가, 군인들이 들이닥쳐 물품들을 죄다 압수해 현장에서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경우도 있다”며 “그랬던 곳이 버젓이 달러 가격판을 붙이고 판매한다는 것은 정부가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알타미라(Altamira) 지역의 한 상점에 상품들이 즐비한 가운데 시민들이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카라카스=이대혁 기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알타미라(Altamira) 지역의 한 상점에 상품들이 즐비한 가운데 시민들이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카라카스=이대혁 기자

◇전국 정전, 경제 반등 불렀다

지난해 3월 7일 베네수엘라 전역은 암흑에 휩싸였다. 원래부터 부족했던 전력이 갑자기 모두 끊긴 것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는 전력 공급 중단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몰아세웠지만, 실은 유지보수를 못한 발전소 케이블이 나무 뿌리에 닿아 타버리면서 발전소 자체 보호시스템이 작동해 전력 공급을 멈춘 것이었다.

지역별로 24~48시간 동안 이어진 이 정전이 2013년 이후 고꾸라지기만 하던 베네수엘라 경제를 반등시키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전기가 끊기자 주민들은 음식과 식수, 생필품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정전으로 카드리더기는 작동하지 않아 카드는 무용지물이었고, 치솟는 가격에 볼리바르화 가치는 시간별로 떨어져 거래가치를 상실했다. 라울 패사노(26)씨는 “이를 계기로 마트에서 달러를 받기 시작했고, 물건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집에 숨겨뒀던 달러를 꺼내왔다”고 회상했다.

달러화 유통은 죽었던 경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달러가 계속 나오자 상점의 물건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생필품 부족에 국민 불만이 높아가던 때, 서방의 퇴진 압력을 받던 마두로 정권은 손 놓고 지켜만 봤다. 이에 가격통제가 사실상 사라지고, 달러 거래가 용인되면서 해외로부터의 수입도 늘어났다. 이후 달러는 급속도로 시장을 잠식했고, 이제 상당수 민간 기업은 달러로 월급을 주고 있다. 루이스 바르세나스(36) 경제분석가는 “현재 근로자의 50%는 월급을 볼리바르로, 35%는 달러와 볼리바르를 섞어서, 15%는 달러로 받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달러 유통으로 수입과 소비가 크게 늘면서 2019년 1만8,000%로 예상되는 물가상승률이 2020년에는 4,000%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수입상품점에 물건이 쌓여 있다. 카라카스=이대혁 기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수입상품점에 물건이 쌓여 있다. 카라카스=이대혁 기자

◇달러화도 인플레이션

달러는 많은 곳에서 사용됐지만 거스름돈 받기는 어려웠다. 카라카스 베요몬테 지역의 수입상품점엔 각종 외국산 장난감, 맥주, 과자, 시리얼 등으로 가득했다. 역시 가격표는 달러로 돼 있었다. 이곳에서 수입맥주 6캔과 감자칩, 롤케이크 등을 담자, 다소 비싸게 느껴지는 46달러가 청구됐다. 5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자 점원은 “46달러를 지불하거나 4달러어치 물건을 추가 구매하라”고 말했다. 소량의 육포 2개를 추가하고서야 50달러를 채울 수 있었다. 최대한 달러를 확보하려는 상술이었다.

2018년 100만%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현지 화폐 볼리바르화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상승한 상품 가격은 달러 거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르세나스는 “볼리바르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곧바로 물건을 소비하면 그게 바로 가격을 더욱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데, 덩달아 달러로 표시된 가격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달러 인플레이션도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기자의 호텔 숙박비는 하루 100달러가 넘었는데, 불과 두어 달 전에는 하루 40~50달러면 충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외국인은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13일 카라카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빌라(Avila) 국립공원의 케이블카를 이용하려 하자, 관계자는 기자에게 현찰로 미화 20달러를 요구했다. 현지 주민들에게 적용하는 이용료의 20배가 넘는 금액이다.

◇달러화, 양극화 가속화 우려

달러 유통은 소비력을 높이면서 단기적으로 베네수엘라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나라를 등진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경우도 적잖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빈부 격차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달러를 구할 수 있는지에 따라 구매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 상인은 “지금은 볼리바르화 구하기가 더 힘들 정도로 달러가 넘쳐나지만 달러를 접할 수 있는 계층은 기업가, 환전 중개업자, 밀무역자 등 일부에 그친다”며 “마두로 정부가 식물정부가 된 사이 기회를 엿보던 민간에서 스스로 시장원리를 작동시킨 것인데, 언제까지 이런 달러화 경제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달러 경제가 주로 수도 카라카스에 집중된 것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상위 6%에 해당하는 인구가 전체 소비의 90%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바르세나스는 “달러를 만질 수 있는 소수로부터 세금을 걷어 많은 빈민층에 뿌리면 되는 마두로 정부로서는 극심한 양극화가 정권 유지에는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며 “민간에서는 달러화로 자유경제모델로 이동하고자 하지만 정부는 (빈민을 다스릴 수 있는)볼리바르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고 지적했다.

카라카스=글ㆍ사진 이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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