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환자ㆍ의사 상생의 길 ‘왕진’
“할머니, 정말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해. 수액을 놓으면 폐에 물이 찰 수 있으니 먹는 영양제 갖다 드릴게요. 아무리 힘들어도, 먹기 싫어도 이건 꼭 먹어야 해. 먹는다고 나랑 약속해요.”
노인이 되면 누구나 쉽게 하게 되는 거짓말 중 하나가 “살 만큼 살았으니 언제 가도 좋다”는 말이다. 서울 강북구 번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남편과 살고 있는 김모(87) 할머니도 이런 말을 했다. 지난달 중순 심부전 증세가 악화돼 병원 신세를 졌을 때다. 다행히 치료를 받고 증상이 회복돼 퇴원했지만, 본인은 물론 남편인 이모(83) 할아버지까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도 살았으면 됐다”는 말을 부부는 이제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동네 의사’에게 자신들의 건강을 맡기면서다. 노부부가 생의 희망을 바로잡도록 이끌어준 동네 의사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건강의 집 의원’ 김창오(가정의학과 전문의)ㆍ홍종원(일반의) 원장이다. 이 할아버지는 지난달 30일 오후 이들 원장의 가정 방문진료 때 “아내를 돌봐줘 고맙다. 꼭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말할 힘 조차 없는 할머니도 “이번에 죽는 줄 알았어. 원장이 하라는 대로 할게”라며 김 원장의 손을 꼭 잡았다.
건강의 집 의원과 이들 부부의 인연은 2018년 5월 말부터 실시된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으로 맺어졌다. 건강의 집 의원은 지난해 3월 외래진료 없이 방문진료만을 표방하며 문을 열었는데, 당시 번동 3단지 종합복지관에서 치매, 뇌졸중 등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를 통해 할아버지의 건강을 관리하면 좋겠다고 권했다. 그런데 주치의로 등록해 방문진료를 해보니 할아버지보다 복지관에 등록되지 않은 할머니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집 안에서 거동이 가능했지만 할머니는 만성신부전에 섭식장애, 우울증까지 겹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할머니의 몸무게는 당시 34㎏에 불과했다. 심부전 치료도 방문진료 덕분에 가능했다. 김창오 원장은 “지난해 11월부터 할머니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등 심장기능이 급속하게 나빠져 대학병원 치료를 권했다”며 “지난달 27일부터 왕진수가 시범사업이 실시돼 장애인은 물론 일반 환자까지 치료가 가능해져 다행”이라고 말했다.
◇“큰 병원 거부한 딸 치료할 수 있어 감사”
의사가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진료하는 ‘왕진’이 1차 의료기관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시될 수 있는 물꼬가 터졌다. 왕진은 지금처럼 의료기관이 많지 않았던 60~7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대학병원 등 응급시설을 갖춘 의료기관이 급증하면서 모습을 감췄다. 왕진이 사라진 또 하나의 이유는 왕진에 따른 수가가 책정되지 않아 의사들이 왕진을 포기하면서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서 치료받기 힘든 고령 및 중증환자들의 의료접근성을 개선하는 목적으로 지난달 27일부터 ‘1차의료 왕진수가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시범사업에는 전국의 348개 1차 의료기관이 참여한다. 사업에 참여한 1차 의료기관들은 왕진료에 의료행위와 처치 등이 포함된 통합 수가(약 11만5,000원)를 받거나, 왕진료(약 8만원) 외에 추가적인 의료행위를 산정한 별도수가를 받고 환자를 진찰한다.
수가가 책정돼 일반인에 대한 왕진이 가능해지면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집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넓어졌다. 구체적으로 마비(하지ㆍ사지마비ㆍ편마비 등), 수술 직후, 말기 질환, 의료기기 등 부착(인공호흡기 등), 신경계 퇴행성 질환, 욕창 및 궤양, 정신과 질환, 인지장애 등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왕진을 요청할 수 있다.
“딸 아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119를 불러야 하나 노심초사했는데 정기적으로 의사 선생님이 방문해 아이 상태를 점검하게 돼 안심이 됩니다.” 2018년 11월 뇌전증(간질) 증세가 악화돼 뇌 손상을 입어 사지가 마비된 김진아(가명ㆍ26)씨의 어머니 장영희(가명ㆍ50)씨는 왕진제도 실시를 환영했다. 김씨는 폐렴에 요로결석, 신장염 등 합병증이 발생해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병원 측에서 “수술도 끝났고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다”며 퇴원을 종용해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30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자택을 찾았을 때 김씨의 코와 팔 등에는 호흡과 치료를 위해 주사줄이 매달려 있었다. 장씨는 “딸의 몸에 달린 주삿줄만 3개 이상인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런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로 가는 것 자체가 무리”라며 “왕진제도가 생겨 그나마 집에서 정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돼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강원 원주시에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모(48)씨도 왕진제도 실시를 반겼다. 그는 “아버지를 입원시키기 싫어 2년간 집에서 모셨는데 아내가 ‘도저히 힘들어 안 되겠다’고 해 요양병원을 찾고 있었다”며 “왕진제도가 생겨 아버지를 더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희 원주밝음의원 원장은 “지방의 만성질환, 치매, 말기 암환자들은 대형병원에서 손을 놓으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등으로 가는 게 현실적인 수순이었다”라며 “왕진사업이 실시된 만큼 의사의 처방에 따라 가정에서 환자를 관리할 수 있어 보호자들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리처방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종희 원장은 “당뇨, 고혈압, 심부전 등을 앓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 환자들은 가족이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 일이 많은데 장기간 대면 진료를 하지 않고 많은 약을 복용하면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고 상태가 악화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라며 “왕진제도를 통해 그동안 대면진료 없이 약만 복용했던 환자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질환 악화 방지와 합병증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홍종원 원장은 “왕진 시 환자 상태를 파악해 질환이 악화되거나 합병증이 염려될 때 신속히 치료가 가능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시킬 수 있는 것도 왕진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사회 약자 돌봐 의사 신뢰 상승 기대
왕진이 바닥까지 떨어진 의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김창오 원장은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 보면 왕진을 요청할 환자들은 오랜 기간 투병 생활로 인해 경제‧정신적으로 힘든 약자들일 것”이라며 “수가가 낮지만 의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돌보면 1차 의료기관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의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왕진사업에 참여한 의사들이 초기 보건소와 장애인종합복지관, 종합사회복지관 등과 지속적으로 소통해 환자를 발굴하는 등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의사들의 자각이 결부돼야 왕진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은 “왕진을 통해 고령환자, 만성질환자 등을 지역에서 관리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고무적이다”라며 “왕진사업이 활성화되면 병원이나 요양원에 의존해 환자를 관리할 수밖에 없는 ‘시설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사무처장은 “고령 환자, 만성질환자, 암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1차 의료기관의 기능을 정상화해야 하는데 왕진사업이 이를 인도하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메디 스토리’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계 종사자들이 겪는 애환과 사연, 의료계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한국일보>의 김치중 의학전문기자가 격주 월요일 의료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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