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오은영의 화해] “욕설·막말 남편, 제가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아요”

입력
2020.01.06 04:40
수정
2020.01.06 07:15
27면
0 0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3세, 5세 아이 둘을 키우는 결혼 7년 차 맞벌이 부부입니다.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저는 소개팅으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우선시하는 반듯한 모습에 반해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화가 날 때마다 욕을 하고, 폭력에 가까운 막말을 합니다.

제게 처음 욕을 한 것은 신혼 때였어요. 제가 너무 충격을 받자 그 이후로는 욕을 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고 육아가 힘들어 싸움이 잦아지면서 제게 다시 욕을 합니다. 입에 담기 힘든 욕은 물론 이혼하자는 말과 친정 식구에 대한 비난, 제 직업이나 성격에 대한 모욕 등을 포함해 막말을 마구 퍼붓습니다. 그런 언어폭력은 자신의 화가 다 풀릴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됩니다. 친정으로 달려가 저를 비난하면서 같이 못 살겠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어요. 남편은 제가 남편 대우를 해주지 않고, 술자리에 가는 걸 싫어해서 이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남편을 보면 남편에게는 분노를 담는 작은 그릇이 있고, 그 그릇이 다 차면 가장 가깝고 만만한 저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가 남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습니다.

남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어요. 남편이 세 살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새어머니가 생겼습니다. 새어머니는 남편을 학대했어요. 걸핏하면 때렸고 우물에 던져 넣거나 포대에 넣어 묶어 두고, 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결혼 뒤 시어머니와 남편이 싸우는 것을 봤는데 서로 욕하고 막말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어요. 남편은 성인이 된 후에는 독립했고 지금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생활력이 강하고 빠릿빠릿한 사람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렸을 적 저희 집은 가정형편이 어려웠어요. 부모님은 항상 성실히 일하셨지만 배움이 짧아 벌이가 많지 않으셨어요. 늘 바빠 저와 형제들을 돌볼 틈이 없었어요. 일곱 살 때는 학교에 간 오빠와 언니를 기다리며 혼자 있기도 했어요. 시댁 식구들과 싸우면서 생계까지 책임졌던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커서 전문직 부부로 살면서, 고상한 분위기가 있는 가정을 꿈꿨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 둘을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키우고 싶은데 욕하고 막말하는 남편과 잘 지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남편이 몇 시간씩 욕을 퍼부을 때면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펑펑 울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저희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제가 남편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소라(가명ㆍ37ㆍ교사)


소라씨, 인간은 누구나 종류가 다를 뿐이지 마음 안에 채워지지 못한 구멍들이 있어요. 우리들 모두 예외 없이 누군가의 자녀이지요. 자식에게 큰 상처를 준 부모들, 그들도 자식을 사랑할 겁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랑이 상처가 되었을까요?

안타깝지만 자식의 마음을 보지 못한 채 고통을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을 한 겁니다. 우리를 키워준 부모나 어른 또한 완벽하지 않기에, 미성숙하고 취약하기에 나쁜 면들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겠지요. 이런 미성숙함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자녀를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해요.

구멍은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내면의 갈등에서 오는 결핍이지요. 인간은 그 구멍이 건드려지면 너무 힘들고 아픕니다. 때로는 부정하기도 하고 감추기도 합니다. 소라씨 남편은 그런 미성숙한 면이 조금만 건드려져도 내면의 어린아이가 툭 튀어나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겁니다. 새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당하면서 얼마나 힘든 시절을 보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배우자와 아이에게 욕을 해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남편은 고쳐져야 할 사람이지만, 남편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중요해요. 남편은 인간으로서 편안하게 존재하는 게 쉬운 사람이 아닐 거예요. 소라씨가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자신의 취약한 부분이 건드려지면 남편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고 말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잘 알아차려서 최소한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도록 해야 해요. 무조건 참거나 이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자 또한 중요한 상대방이므로 그가 아파하는 부분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지요.

저는 소라씨가 남편에게 ‘당신이 욕을 할 때 아이들이 느낄 감정과 공포를 생각해보라’고 얘기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어릴 적 새어머니의 학대 때문에 벌벌 떨었을 때처럼, 아이들도 어쩌면 그때의 당신처럼 지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남편에게는 당신을 안전하게 키워준 부모가 없었지만, 부모가 된 당신이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렸을 때 속절없이 당했지만, 지금의 당신은 모든 걸 선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욕하지 않고 말하는 것도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으라고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소라씨, 남편의 구멍은 무엇일까요. 남편은 새어머니로부터 단 한 번도 존중받지 못했어요. 남편은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면의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본능처럼 악다구니를 씁니다. 남편은 행복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 가까이 와서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분노와 증오, 적개심을 폭발시킵니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남편에게는 엄청나게 큰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취약한 부분이 다르고 이것이 건드려졌을 때의 반응도 다릅니다.

그런 남편의 비위를 잘 맞추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이 문제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겹겹이 쌓인 남편의 문제예요. 당신이 잘못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노력해도 남편은 금세 바뀌지 않습니다. 남편 스스로 깨닫고 노력해 고쳐나갈 문제입니다. 날 선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가족을 베지 않도록 스스로 날을 거둬야 합니다.

다만 남편에게 욕하지 말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지 말고, 어떤 부분이 못 견디게 괴로운 건지 얘기를 나누는 게 관계 개선에 도움될 거예요. 남편은 괴로운 부분을 아내에게도 얘기하고, 소라씨도 그것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되 남편에게 ‘나 또한 당신이 나의 이런 부분을 건드리면 견딜 수 없이 아프다’라고 얘기해보세요.

물론 이전에 해보셨을 거예요. 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느끼실 거에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바뀌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을 서로 알면, 지나치게 아프게 하는 게 덜해지지 않을까요. 부부 갈등이 있을 때 저는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보라고 해요. 상대가 어떻게 해주길 요구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상대에게만 바뀔 것을 요구합니다. 스스로를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그럴 때 부부도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당신이 연애 시절 반듯하지 못한 사람에게 끌리고,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신은 어렸을 때 남편처럼 학대를 받은 것도 아니고 가정도 비교적 화목했어요. 부모의 삶은 힘들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했고, 당신도 다소 아쉽고 부족한 것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당신의 삶을 잘 영위해갔어요. 당신의 마음 안에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이나 분노, 슬픔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이성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당신 또한 결핍으로 인한 구멍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 구멍은 외로움이에요. 당신은 남편에게 보호받는 것보다 외로움을 채우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당신은 기복이 없고 잔잔한 사랑보다, 강렬하면서도 극적인 감정으로 외로움을 채우고 싶어 하는 면이 있을 수 있어요. 아마 평범한 사람을 만나면 뜨뜻미지근했을 거예요. 강렬한 사랑이나 자극이 당신의 외로움을 순간순간 충족시키는 경험을 했을 거예요.

그런 감정은 당신의 성장과정에서 생긴 걸 거예요.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적어서, 당신을 살뜰하게 돌봐줄 겨를이 없었던 부모의 빈자리가 당신의 깊은 마음 한 구석에 외로움을 남겨놨을 거예요. 일명 나쁜 남자들이 주는 강렬한 감정을 통해 그 외로움이 잠시 채워지는 묘한 충족감을 당신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건강한 감정은 아니에요. 남편이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를 때 당신은 무섭다기보다 이 외로움이 더 강하게 건드려질 거예요. 어릴 때 집에 혼자 있으면서 가족을 기다리면서 울던 어린아이처럼 지금의 당신도 남편이 몇 시간씩 욕을 할 때 혼자 울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이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도 외로움을 느낄까 걱정하는 겁니다. 당신은 우울하거나, 분노에 차 있다기보다 외로운 겁니다. 당신 마음 속 외로움을 조금씩 메우려 해야 합니다.

남편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좀 가볍게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부터 나눠 보세요. 남편이 당신이 보기에 별 의미 없는 술자리를 좋아한다면 큰 문제가 없다면 보내주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남편은 깊은 관계보다는 적당히 거리감 있는 사람들과 가벼운 관계가 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이혼을 원하지 않는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주위에서는 ‘이혼하면 되지, 그럴 바에는 왜 같이 살아’라고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이혼은 그렇게 쉽게 결정해서도, 결정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남편을 선택한 것부터가 소라씨 잘못이었다고 질책하는 사람도 있을 거에요.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시간이 지난 뒤 뼈아프게 후회하더라도 그 당시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많지요. 다만 나의 후회가 또 다른 후회를 낳지 않도록 지금의 후회를 잘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조금씩 개선해보려는 노력을 해보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그때 결단을 내려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충분히 서기 전까지 두 사람 모두, 아이들 앞에서 이혼이라는 말은 쉽게, 함부로 해선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란 어렵지만 최소한 해가 되는 부모가 돼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내려받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