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을 가다, 이슈를 읽다] <5> ‘만18세 선거권’ 개정안 통과 이후
“기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선거법이 통과되면서 당장 2020년 총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수십만 18세도 그렇습니다.”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서울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 선거연령을 기존 만19세에서 만18세로 낮춘 공직선거법 개정을 축하하는 행사 ‘2020년 총선 청소년 유권자가 온다’에 온 최유경 청소년페미니스트네트워크 ‘위티’ 대표가 “(개정 선거법이) 19금의 구역이라 여긴 정치의 경계를 부수었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전국 370개 청소년·시민단체의 연합체인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이하 촛불청소년연대)가 주최한 이 날 행사에는 2001년 6월생 최 대표를 비롯해 18세 선거권 운동을 해온 활동가 수십 명이 참석해 장미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나눴다. 2017년 결성된 촛불청소년연대는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3월부터 국회 앞 농성, 삭발식, 자유한국당 기습시위 등 선거연령 하향 운동을 해왔다. “이곳에서 삭발했다”는 김윤송 양은 “비록 생일이 늦어 4월 총선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투표할 수 있다고 기뻐하는 걸 보며 무언가 바뀌었다고 느낀다. 국회의원들은 선거권 하향을 자신들의 성과로 ‘뻐기지’ 말고 이제야 통과시킨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선거연령 하향 조정으로 4월 총선에 투표 참여가 가능한 유권자는 2002년 4월 16일 이전 출생자다. 고3 유권자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새로 편입된 약 50만명의 만18세 유권자 중 10% 정도가 고등학생으로 추정된다.
◇줏대 없는 교사 될라... 매뉴얼 만들어달라
“대상은 고3이란 말입니다! 고2가 아니라!” 서울 목동 지역 인문계고등학교 교사 김영두(가명)씨는 “방학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총선 전 교내 선거교육이 가능한 건 3, 4월”이라면서 “자기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기간인데, 선거로 교실 분위기가 들떠 입시에 영향을 미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교사의 정치 중립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국내 현실에서 선거를 앞두고 학생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날 때 교사의 중재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고민도 덧붙었다. 그는 “교사가 현실 정치에 주관을 갖고 의견을 표명하면 법령 위반이다. 아이들 눈에 (정치 의견 없는) 교사가 줏대 없는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선거연령을 낮춘 거 같다”면서 “당장은 교실 안에서 누구도 정치의견 표명을 못하게 하는 조례를 만들어 지역마다 내보내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수도권 한 인문계 고등학교 교감 김홍근(가명)씨는 “솔직히 교사들도 선거법 개정안이 교실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잘 모른다. 아직 학교에서 논의해본 적도 없다. 우리만 이럴 것 같진 않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가뜩이나 요즘 각 학교가 교내폭력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는데 선거교육까지 학교 안으로 들어오면, 교사들이 감당하기 너무 어렵다. 관리자 입장에서 사전 사고 방지를 위한 연수가 필요할 것 같다. 2월 학교폭력 예방 교사 연수 때 선거교육도 넣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운영하는 교권보호 및 치유지원센터 ‘공감’이 지난 한 해 학생·학부모로부터 교권침해 당한 교사를 상담한 건수는 1,335건(센터상담 771건, 법률상담 564건)에 이른다.
서울 강남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인 권현은(가명)씨는 “학생들이 당장 4월에 투표권을 갖는 게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일부 남학생은 ‘페미니즘 반대 정당이 있으면 투표하겠다’고 하더라. 특정한 이슈 하나만 보고 자기 선거권을 바로 행사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데, 관련 지식을 설명해주면 현행 교원 복무규정상 정치 개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정 선거법 통과 전부터 의견이 둘로 갈린 교원단체들은 대책 요구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3일 보도자료를 통해 “학교·교실 내 선거운동, 정치활동을 금지·제한하도록 공직선거법, 지방교육자치법 등 관련법 개정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지난달 30일 ‘18세 선거연령 하향을 환영한다’는 논평에서 “성공적인 민주시민 교육을 위해 교사의 정치기본권 역시 국제적 보편기준, 기본권과 인권의 측면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대 반, 우려 반’이라 말하기도 시기상조
“선거 때 분란이 일 거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정작 관심이 별로 없을 겁니다.” 수도권의 한 자립형사립고등학교 2학년 담임인 이진수(가명)씨는 “개정안이 지난달 27일 통과됐는데, 대개 고등학교가 다음날(28일)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언론은 ‘기대 반 우려 반’이라고 하지만 학교 분위기는 그런 말 꺼내기도 시기상조인 단계”라고 말했다. 이씨는 “학생들이 선거법 개정을 알지만 교사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서, 종례 때 안 물어보더라. 아직 반응 자체가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8세 투표권에 대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반응은 △선거법 개정을 대다수가 알지만 모르는 당사자도 적지 않고 △교육 전반에 미칠 파급력이 클 것이라 예상하지만 △당장 체감하기 어렵다로 요약됐다. 2월 중 대안학교를 졸업하는 3학년 신지혜(가명)양은 “올해부터 투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체감할 수 없는데, 후배들도 이럴 것 같다. 대학에 붙었지만 입학 전까지 대학생활 실감 안 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반 학생 27명 중 10명 이상이 내년에 투표권을 갖는다”고 말하는 부산의 한 인문계고 2학년 박윤채(가명)양은 “학교에서 진지하게 토론한 적은 없지만 쉬거나 밥 먹는 시간에 한두 마디 하는 식으로 (선거연령 하향을) 얘기한 적은 있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참정권 운동을 벌인 끝에 법이 바뀌었다는 정보공유부터 ‘투표권은 있지만 투표 안 할 생각’이란 의견 표명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역시 선거에 관한 교사의 언급은 들어볼 수 없었다. 박양은 “(선생님과 이와 관련한)얘기를 나눌 기회가 아예 없어 약간의 분위기라도 조성이 되면 좋겠다.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다. 교육 시간을 따로 내줘 관심 있는 학생끼리라도 얘기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북의 인문계고등학교 2학년 딸을 둔 하명희씨는 “개정법 통과 후 또래 사이에 한차례 이슈가 됐다더라. 생일 빠른 애들은 ‘나는 선거한다. 어른이다’ 자랑한다는데, 학교에서는 별도 설명이 없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 전 교과목에 영향 미칠 것
18세 선거권이 장기적으로 교육계에 미칠 파장이 클 것이란 예상은 많다. 지난달 교육학자, 현장 교사 4인과 함께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만나다!’(맘에드림 발행)를 출간한 서지연 경기 수지중학교 교사는 “(정부가) 정책 만들 때, 아이들이 항상 대상화됐는데 이제 주체화되는 길이 열렸구나 싶었다. 학생이 국회의원을 뽑을 때 교육정책도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 교사는 “사회과 교사들 사이에서는 ‘물 만났다’고 한다. 교사가 정치발언 못 하게 가로막는 학교 규칙도 완화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요즘 학생들은 사회 현안이 궁금할 때 유튜브를 보는데, 한번 ‘일베(극우 성향 커뮤니티)’ 등의 콘텐츠나 가짜뉴스를 보기 시작하면 계속 그런 종류의 정보를 봐요. 교육 현장에서는 ‘교실 안 여성 혐오’가 초등 5학년까지 내려갔다고 보는데, 정치 중립 의무로 교사들이 사회현안에 대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죠. 선거와 정치 교육을 계기로 (교사가 정치 발언할) 가능성을 열어주길 기대합니다.”
서 교사와 책을 공동 집필한 윤상준 경기 안양 양명고 교사는 “단기적으로 ‘정당 간 정책평가’와 같은 수행평가를 많이 할 것 같다”면서 “장기적으로 교육정책의 직접 수요자인 학생의 의견이 반영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도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가 됐다’는 인식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현은 교사는 “수학, 과학 등 몇 개 과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역사, 사회는 물론이고 국어나 영어 같은 제재(題材)를 다루는 과목은 수업 때 교사의 가치 판단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앞의 두 교사와 달리 “교사들의 현안 코멘트는 더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근 인헌고 사태를 겪으며 교사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데 상당히 위축된 데다, 18세 선거권으로 보수단체들이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상황이라 자칫 어떤 말이 ‘민원의 대상’이 될지 몰라서다.
◇뒤늦게 선거교육 매뉴얼 만드느라 분주
패스트트랙에 올라가 이미 국회 통과가 예정됐던 ‘18세 선거’에 대해 교육부는 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선거법 개정 전 선거교육 매뉴얼을 만드는 순간 교육부가 ‘정파적 시그널’을 준다고 비난 받았을 거다. 일단 개정안 통과하고 나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관료의 입장이 있었던 거 같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의 해석에 한 교육부 고위 관료는 “그렇다”고 답했다. 교육부가 정치권 눈치 보느라 뻔히 보이는 혼란을 자초한 셈이다. 무엇보다 비례대표제 계산에 집중하느라 개정안 시행령 등을 꼼꼼하게 따지지 못한 국회의 잘못이 크다.
2015년 6월 선거연령을 만20세에서 만18세로 낮춘 일본은 법 시행까지 1년의 유예 기간을 뒀다. 개인적인 주장·주의 대신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지도한다는 큰 원칙 아래 체계적인 정치지도계획을 수립했다. 우리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문부과학성이 고등학생의 정치, 선거운동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총무성이 학생용 부교재와 교사용 지도서를 2015년 12월 배포했다. 각 지역 선거관리위원회는 출강 형식의 수업과 모의선거를 학교마다 진행했고, 학생들을 위해 학교 안 방문투표소를 운영하는 등 별도의 편의를 제공했다. 일본 고등학생의 첫 투표는 선거법 개정 13개월 후인 2016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이뤄졌다. 고선규 일본 도호쿠(東北)대 교수가 발표한 ‘일본의 18세 선거권 실시과정에서 총무성·시민단체·정당의 역할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일본의 참의원 선거에서 만18세의 투표율이 만19세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았는데 이는 “18세 대부분이 고교생으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선거교육을 받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국내 교육 관련 부처들은 부랴부랴 선거교육 자료집 논의를 시작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달 중순 일본의 선거교육에 관한 5개월 단위의 연구프로젝트를 수주, 교육부와 별개로 선거교육 매뉴얼을 만든다. 당초 40개 학교 수준으로 준비한 모의선거교육도 60개 학교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교육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협의해 2월 말까지 선거교육 가이드라인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6일 세종시에서 관련 첫 시·도 장학사 회의가 열렸다. 신두철 교육부 민주시민교육과장은 “선거교육에 관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이 나와야 구체적인 안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지연 교사는 “당장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교육부, 학교, 교사, 학생, 학부모의 상황이 모두 다르다. 큰 틀에서 선거교육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상준 교사는 “고3 학생들이 후보들의 이력, 공약을 일일이 찾아보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각 정당이 공약집부터 쉽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