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OEM社 ‘홈쇼핑 중개상’ 변신, 김기문 회장 임기와 매출 등락 겹쳐
‘부총리급 의전’ 회장 선거 복마전… “감투 싸움에 中企 대변 못해” 지적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이하 중앙회) 회장 소유의 로만손(현재 제이에스티나로 사명 변경)은 시계가 대표 상품이었다. F사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시계를 만들어 로만손에 납품했다. 이 회사는 김 회장의 부인과 동생, 매형 등이 주주이자 등기이사를 거친 가족 회사로, 1995년부터 김 회장의 매형 김모(70)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그런데 2012년 중앙회 관리를 받는 홈쇼핑 회사인 홈앤쇼핑이 문을 열자 F사는 돌연 업종을 바꿔 홈쇼핑 벤더 사업에 뛰어들었다. 벤더는 홈쇼핑 회사와 납품업체간 거래를 중개하며 수수료를 받는 중간 유통업자다. F사는 다른 홈쇼핑과는 거의 거래하지 않았고 매출 대부분이 홈앤쇼핑과의 거래에서 발생했다. F사는 침구류 등 인기상품을 유치하며 단번에 연간 1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문제는 F사 대표 김씨의 처남인 김기문 회장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홈앤쇼핑 대표를 지냈다는 점이다. 중앙회가 홈앤쇼핑 최대주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 회장이 홈앤쇼핑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한 중소기업 협동조합 이사장은 “당시 F사와 통하면 홈앤쇼핑과 거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납품업체들 사이에서 파다했다”고 말했다. 침구류 제조업체는 F사와 거래하게 된 경위를 물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F사는 김 회장이 2015년 초 중앙회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덩달아 실적이 안 좋아졌다. 매년 100억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던 회사가 2018년 17억원으로 곤두박질했다. 그러나 김기문 회장이 중앙회 수장에 다시 등극한 지난해부터 홈앤쇼핑과의 거래가 늘어나면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F사는 매출 등락이 김 회장 임기와 공교롭게 겹쳤을 뿐이라고 밝혔지만, 중앙회 안팎에선 “김 회장 퇴임 이후 더 이상 연줄이 없어 매출이 감소했던 것 아니겠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김씨는 이에 대해 “김 회장에게서 어떤 도움도 받은 바 없다. 사업이 어려워 빚도 꽤 많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 측도 “홈쇼핑 상품 선정과 방송편성 과정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특혜를 주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가족 업체라는 사실이 거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전반적인 평가다. 한 대기업 홈쇼핑 상품기획자(MD)는 “홈쇼핑 대표의 가족 업체라고 소개만 해도 납품업체는 믿고 물건을 맡기게 된다. 홈쇼핑 MD들도 이런 벤더가 가져오는 상품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권한 크고 혜택 많아 눈독
김기문 회장과 F사의 거래는 중앙회장 자리를 놓고 매번 후보자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권한이 크고 혜택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책임질 일은 적다는 것이다.
중앙회장은 명목상 무보수 명예직이지만 공식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적지 않다. 회장은 중앙회에서 활동비 명목으로 매년 1억2,000만원을 지급받고 차량과 비서진, 사무실 등도 제공된다. 정부 주관 행사에서 부총리급 의전을 받는 것은 물론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도 수시로 동행한다. 중소기업의 여건이 안 좋아질수록 정부는 중앙회장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영향력이 커지는 측면도 있다. 역대 회장 11명 중 6명이 국회의원을 지냈을 정도로 임기를 마친 후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는 일도 잦다.
더구나 무보수라고 해도 실질적으론 무보수가 아니다. 중앙회장은 홈앤쇼핑 사외이사를 관행적으로 겸임해 연간 1억원을 받는다. 김기문 회장은 과거 홈앤쇼핑 대표까지 맡아 2012년부터 3년간 27억원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박성택 전임 회장도 홈앤쇼핑 이사회 의장으로서 3년간 7억원을 받아 갔다. 김 회장은 2014년 네이버가 출연한 기금으로 만든 ‘중소상공인 희망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매달 700만원씩 정기 보수를 받기도 했다. 김 회장은 문제가 되자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받은 돈을 반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도 적지 않다는 게 중소업계의 평가다. 김기문 회장이 중앙회장을 맡은 후 로만손은 급성장했다. 23대 회장 임기 첫해인 2007년 571억원이던 매출은 24대 회장 임기 마지막 해인 2014년엔 1,586억원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다가 박성택 회장에게 수장 자리를 넘겨준 뒤부터 상승세가 꺾여 2018년 매출액은 1,260억원에 머물렀다. 중앙회장을 지냈기 때문에 김 회장 회사가 성장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다른 홈쇼핑 채널에선 나오지 않는 로만손 시계를 홈앤쇼핑에서만 황금 시간대에 여러 번 편성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지적되기도 했다. 중앙회장으로서 다른 재계 단체들과 쌓은 친분이 판로 확대에 도움이 됐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
◇혼탁 예방 선거제도 개선해야
김 회장은 8년 동안 23ㆍ24대 회장을 지냈는데도, 지난해 26대 회장에 다시 도전해 논란이 있었다. 26대 회장 선거 출마과정에선 잡음이 많았다. 제이에스티나가 급성장하며 2016년부터 중소기업을 졸업하고 중견기업이 되자 김 회장은 선거 7개월 전인 2018년 7월 연고가 불분명한 부국금속이라는 업체의 대외담당 대표이사로 취임해 진해마천주물공단조합의 회원 자격을 얻었다. 그는 한 달 뒤 이 조합의 이사장으로 추대됐는데, 당시 이사장이던 박모씨는 잔여 임기 6개월을 남기고 갑자기 사임했다. 이로써 김기문 회장은 조합 이사장만 후보가 될 수 있는 중앙회 회장 선거에 나올 수 있었다.
선거 과정은 혼탁했다. 회장 선거를 앞둔 2018년 말 유권자들과 식사를 하면서 시계 선물을 주고 밥값을 낸 사실이 드러나 김 회장은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지난해 8월 재판에 넘겨졌다. 100만원 이상 벌금형이 확정되면 회장직에서 내려와야 한다. 회장 선거를 앞두고 기자에게 ‘선거에 유리하게 해달라’며 20만원 상당의 시계와 현금 50만원을 줬던 김 회장 비서실장도 기소됐다. 중앙회 전임 수장인 박성택 회장도 중앙회 선거 당시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지난해 12월 징역 8월이 선고됐다.
이처럼 과열 선거의 악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중앙회 회장이 중소기업 대변인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2대 중앙회장을 지낸 김용구 중소기업진흥회 회장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중앙회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부총리급 예우를 받고 대통령 회의에 참석하는 등 힘이 세다 보니까, 중앙회를 감독해야 하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오히려 중앙회장 눈치를 보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중앙회장이 권한을 이용해 권력기관을 불러다가 간담회도 하고 감사패도 주면서 불필요하게 힘을 과시하는 행태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김용구 회장은 중앙회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개선책으로 선거제도의 대폭 손질을 거론했다. 김기문 회장은 23대 회장을 지낼 당시 회원 10분의 1 이상 추천을 받아야만 후보로 나올 수 있는 사전 등록제를 도입했는데, 이는 현직 회장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다. 실제로 사전등록제가 시행된 24대 선거에서 김기문 회장은 단일 후보로 입후보해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범죄를 다른 재판보다 우선 처리한다고 규정한 공직선거법 조항을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불법 선거를 저지른 뒤 유죄판결이 나와도 상소를 거듭하며 임기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구 회장은 “선거비용 상한을 정하고 선거운동 인원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회장의 비대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선거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기태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은 “현재는 각 협동조합 이사장들이 중앙회장을 선출하는 구조인데, 업종별ㆍ지역별 연합회를 만들어 연합회장 중에서 중앙회장을 뽑으면 연합회장들이 각 업종이나 지역을 잘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검증된 인물이 중앙회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소장은 또 “중앙회장이 감사위원 인사권을 갖고 있어 제대로 된 감사가 되기 힘들다”며 “감사위원은 국회 추천을 받거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추천하도록 해서 외부 견제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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