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바다의 우유’라느니 ‘돌에 핀 꽃, 석화’라느니 하며, 피부와 정력에 좋다고 먹어 보라고 아무리 권해도 필자가 피한 음식이 있었다. 꼭 흐물흐물한 콧물처럼 생긴 것이 향과 맛 또한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바로 굴이다.
굴을 처음 먹게 된 건 몇 해 전 프랑스에서 플라토 드 프뤼 드 메르(Plateau de fruits de mer)라는 음식을 맛보면서였다. 여러 산지의 굴을 풍성하게 올려놓은 해산물 플레이트로, 반으로 갈라놓은 껍데기 안에 촉촉한 굴이 놓여 있었다. 지인이 레몬즙을 뿌려 권했을 때 마지못해 입에 넣었다. 그런데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맛있는 게 아닌가. 입으로 쪽 빨아들인 굴은 달았고, 레몬즙을 머금은 국물은 상큼하면서도 짭조름했다. 굴을 먹고 3초쯤 지나 시원한 샤블리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가 삼켰다. 와인이 입 안을 비릿함 없이 말끔하게 씻어 주니 맛이 배가 되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꿀맛, 아니 굴맛이었다!
와인이 그러하듯 굴 또한 산지마다 맛이나 향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특히 ‘프랑스의 통영’으로 불리는 브르타뉴 지방의 캉칼과 남서부의 아르카숑에서 나온 굴은 맛본 지 몇 해가 지났음에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을 정도다. 그날 필자는 일행들 눈치를 피해 굴을 한 개 두 개 입에 넣다가 거의 혼자 다 먹는 만행을 저질렀다.
굴과 샤블리의 마리아주를 감탄하는 사이 갑자기 10여년 전에 읽은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품 속 천재 와인평론가 토미네 잇세가 맛있다고 정평이 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요리를 주문했다. 주인은 생굴에 고급 샤블리 프르미에크뤼를 서빙했다. 잇세는 와인과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며칠 뒤 잡지에는 그 레스토랑의 혹평이 실렸고, 잘나가던 레스토랑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1년 뒤 잇세는 다시 그 레스토랑을 찾았다. 레스토랑 주인은 이번엔 생굴에 곁들여 마을 단위 등급의 저렴한 샤블리를 내놓았다. 잇세는 음식과 와인을 남김없이 먹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크통에서 숙성한 고급 샤블리가 오히려 굴의 비릿함을 더 배가시키기 때문에, 생굴에는 스테인리스스틸통에서 발효 숙성한 마을 단위 등급의 샤블리가 더 어울린다. 와인과 음식의 마리아주를 비로소 알게 된 주인은 1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레스토랑 주인을 울고 웃게 한 샤블리와 샤블리 프르미에크뤼는 도대체 어떤 와인일까. 샤블리는 마을 이름이자 원산지 이름이고 와인 이름이기도 하다. 샤블리 마을에서는 오직 샤르도네 한 품종만 길러 화이트와인만 생산한다.
12세기에 시토회 수사들이 이 지역이 샤르도네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장소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샤블리 테루아르에 맞는 포도재배법과 양조법을 연구했다. 샤블리가 화이트와인의 명산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샤블리에는 ‘샤블리 그랑크뤼, 샤블리 프르미에크뤼, 샤블리, 프티샤블리’라는 4개의 원산지 명칭이 있다. 그랑크뤼와 프르미에크뤼는 프루티하고 오크통 숙성(오크통 사용 정도는 와인마다 다르다)을 해서 맛과 향이 깊은 반면, 샤블리와 프티샤블리는 스테인리스스틸통에서 발효 숙성하여 드라이하면서도 상큼하다.
샤블리는 부르고뉴에 속하는데, 다른 산지와는 동떨어져 최북단에 위치한다. 반대륙성 기후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혹독하게 춥다. 일교차도 크다. 봄에는 서리 피해도 심하다. 이를 줄이려 포도밭에 훈증 용기를 설치할 정도다. 샤블리의 샤르도네가 특히 산도가 높은 이유이다.
흔히 샤블리 와인은 미네랄 풍미가 강하다고 한다. 이 지역은 중생대 2기 쥐라기에 바다였으나, 신생대 3기에 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면서 융기해 육지가 된 까닭에, 굴이나 조개껍질 등 해양생물의 화석이 퇴적해 형성된 석회질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뿌리에서 양분을 공급받는 열매에도 자연히 토양의 성질이 전해지기에, 이곳의 포도는 먼 옛날 바다의 향을 머금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샤블리 와인은 본향이 같은 생선 등 해산물과 찰떡궁합일밖에.
그러면 생굴의 비릿함을 강화시킨 샤블리 그랑크뤼나 프르미에크뤼는 어떤 음식과 먹어야 할까. 버터구이 랍스터나 전복 요리 등도 잘 어울리지만, 굴에 밀가루를 입혀 버터에 노릇하게 지져낸 버터구이 굴(굴 뫼니에르)과 페어링하면 그만이다.
앞서 필자를 새로운 맛의 세계로 인도한 굴은 캉칼과 아르카숑에서 난 것이라 했다. 알고 보니 이 굴은 우리나라 참굴과 같은 종이라고 한다. 결국 필자는 뒤늦게 비싼 값에 굴맛을 알게 된 셈이다. 아무튼, 굴이 제철이니 통영굴과 고흥굴에 샤블리를 올려 한 상 차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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