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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 이어 ‘빚 고문’까지… 인혁당 피해자 두 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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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 이어 ‘빚 고문’까지… 인혁당 피해자 두 번 운다

입력
2020.01.11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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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복씨 ‘국가 폭력’ 46년 고통… 아들도 ‘빨갱이 가족’ 낙인 

 재심 무죄로 받은 배상금, 대법 “절반 반환”… 年20% 이자에 빚더미 

 “국가가 배상액 산정해 놓고 부당이득이라며 모욕, 집도 뺏길 판”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이창복(오른쪽)씨와 아들 송우(필명)씨가 6일 경기 양평군의 이씨 자택에서 지금까지도 가족 전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털어놓고 있다. 송우씨는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 기관들이 법리적이고 기계적인 접근만 한다. 완전히 블랙코미디”라면서 울분을 토했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이창복(오른쪽)씨와 아들 송우(필명)씨가 6일 경기 양평군의 이씨 자택에서 지금까지도 가족 전체가 겪고 있는 고통을 털어놓고 있다. 송우씨는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 기관들이 법리적이고 기계적인 접근만 한다. 완전히 블랙코미디”라면서 울분을 토했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국가는 잔인했다. 아버지를 고문해 ‘간첩’으로 만들고, 감옥에 가뒀다. 네 살 꼬마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됐다. 8년 만에 아버지가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아들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군인의 꿈도 접었다. 가슴에 맺힌 설움은 철이 들면서 조금씩 사라졌으나, 국가폭력에 온 가족이 입은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진 못했다. 억울해도 참고, 그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명예가 회복된 건 34년이 지나서였다. 재심 무죄 판결로 아버지는 간첩 딱지를 뗐다.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금도 받았다. 오랜 고통이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반전이 시작됐다. 사법부는 ‘배상금이 과다 책정됐다’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최종 결론을 냈다. 국가는 이미 지급한 돈의 절반 가량을 토해내라고 했다. 무서운 속도로 불어난 빚은 애초 배상금보다도 많아졌다. 거액 채무자가 된 가족의 삶은 또 한번 뒤틀리고 있다. 심지어 구순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안식처마저 경매로 넘어갈 위기다. 국가의 ‘2차 폭력’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다.

이송우(필명ㆍ49) 시인은 박정희 정권 최악의 용공 조작 사례인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 이창복(87)씨의 장남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을 주고받는 이때, 그는 희망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새해 벽두인 지난 3일, 경기 양평군의 이씨 자택에서 만난 이들 부자는 4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인혁당’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그들의 사연을 들어 봤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유신정권 유지를 위해 “북괴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이라면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가공의 단체를 조작해 낸 사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또 다른 17명에겐 징역 5~20년 또는 무기징역을 각각 확정했다.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돼 ‘사법 살인’으로 불리며, 국제법학자회는 사형 집행일인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1964년 인혁당 사건(1차)과 구분해 ‘2차 인혁당 사건’으로도 지칭된다. 

 

 ◇아빠가 간 ‘미국’은 감옥… 출소 후엔 연좌제 

“아버지는 미국에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아빠 만나러 가자’ 하는데 버스를 타는 거예요. 미국은 비행기 타고 가는 나라로 알았는데 의아했죠. 미국이 이사를 왔나 싶었어요.”

이송우 시인은 아빠와 함께했던 유년기 기억이 거의 없다. 부친 이씨가 1974년 5월 중앙정보부(중정)에 의해 끌려간 탓이다. 칸트 철학을 전공한 이씨는 당시 일본 도쿄대 박사과정 유학을 앞둔 서울대 강사였다. 유신 반대 활동이라고는 지식인 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가입, 집회 몇 번 참가가 전부였다. 그러나 중정은 몽둥이 찜질 등 온갖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결국 가짜 진술서에 날인했다. 대법원은 이씨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이창복(오른쪽)씨와 그의 아들 이송우씨. 1974년 5월 이씨가 중앙정보부에 강제연행돼 ‘간첩’으로 몰려 8년간 수감생활을 할 동안, 송우씨는 그야말로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았다. 1982년 이씨가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이후엔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 이른바 연좌제가 시작됐다고 했다. 송우씨는 “나는 반공교육을 강하게 받은 세대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저 스스로도 낙인을 찍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이창복(오른쪽)씨와 그의 아들 이송우씨. 1974년 5월 이씨가 중앙정보부에 강제연행돼 ‘간첩’으로 몰려 8년간 수감생활을 할 동안, 송우씨는 그야말로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았다. 1982년 이씨가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이후엔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 이른바 연좌제가 시작됐다고 했다. 송우씨는 “나는 반공교육을 강하게 받은 세대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저 스스로도 낙인을 찍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이 시인이 ‘미국’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건 초등학교 진학 무렵. TV에 나온 감옥 내 면회실을 보니 아버지가 계신 곳과 똑같았다. 도둑질이나 살인 등을 저지른 ‘나쁜 사람’이나 가는 곳이었다. 모친인 박인순(84)씨가 “아빠는 나라를 위해 일하시다 갇힌 것”이라고 달랬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이 시인은 자신의 시 ‘유신의 기억 3’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TV 드라마에서 본 그 죄수는 / 아비를 닮았다 / 아빠, 범죄자예요 / 아니다 / 거기, 안에 미국이 있나요 / 미안하다”

아홉 살 때였을까, 이 시인은 푸른 수의를 입은 이씨한테서 ‘이제 장남인 네가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면회를 마쳤을 때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웠어요. 개구쟁이처럼 뛰어 놀 때이지, 그런 짐을 짊어질 나이는 아니잖아요. 참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이씨는 1982년 3ㆍ1절 특사로 출소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이 시작됐다. 12년의 보호관찰 처분 때문이었다. 형사들은 이씨 집을 하루 종일 들락거렸고, 이웃들이 그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했다. 동네 꼬마들은 이씨에게 “할아버지는 빨갱이라지요”라고 물었고, 어른들 역시 그가 어딘가를 다녀오면 “김일성 만나고 왔느냐”라고 조롱했다. 이른바 ‘연좌제’의 시작이었다.

“가장 무서운 건 스스로도 낙인을 찍는다는 거예요. 중학생 때 반공웅변대회 금상도 받았던 제가 알고 보니 빨갱이의 아들이었던 거죠. 분열된 자기정체성 때문에 힘든 소년기를 보냈어요.” 특히 고3시절, 이 시인은 이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주변에서 ‘연좌제로 좋은 직업을 못 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탓이다. 군인이나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아예 시도조차 않고 스스로 포기했다. “그때 술, 담배를 좀 했거든요. ‘고3이 왜 술을 먹고 다니냐’고 하신 아버지한테 ‘자식 앞길을 다 막은 아버지가 무슨 할말이 있다고 이럽니까’라고 되받아쳤어요. 1~2주 동안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못하셨어요.”

이런 얘기를 할 때쯤 이 시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눈물도 고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들의 말을 잠자코 듣던 이씨가 자리를 떴다.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 북받쳐 오르는 듯 보였다. 이 시인은 “아버지가 괴로워하는 걸 즐기며 피해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에 너무 모질고 나쁜 말을 했다”면서 울먹였다.

교사를 꿈꿨던 누나(51)의 사례는 좀 더 구체적이다. 1990년대 중반 교사임용고시 필기 시험을 2년 연속 통과했는데도 최종 면접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다. 이 시인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당시는 지금과는 달라, 결정적 하자만 없으면 면접에선 모두 합격하던 때”라고 설명했다. 십중팔구 연좌제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누나는 결국 교단에 서지 못했다.

이 시인은 “그래도 나와 누나는 좀 나은 편”이라며 삼남매의 막내인 남동생(47) 얘기를 꺼냈다. 이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대인기피증과 불면증,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시기, 아버지와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이는 10대 초반이던 막내였다. 고통이 대물림된 것일까. 동생은 대학교 3, 4학년 때부터 자꾸 이상한 말을 했다. “증세가 갈수록 심해졌어요. 회사 10여곳을 전전하는 등 사회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고요. 막내를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동생은 현재 조현병 치료를 받고 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국가 배상금, 대법원이 대폭 깎아 

이씨 가족을 덮친 30여년간의 풍파가 끝나는 듯했던 순간도 있었다. 2008년 1월 이씨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1심 승소로 2009년 8월 법원이 정한 배상금의 65%인 10억9,600만원(가족 포함 총 28억3,000만원)도 가지급받았다. 앞서 이뤄진 2007년 사형수 8명의 재심 무죄 선고, 유족의 손배소 승소(전체 배상금 637억원)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씨는 배상금으로 그동안의 빚을 갚고, 인혁당 피해자를 위한 ‘4ㆍ9통일평화재단’ 설립에도 힘을 보탰다. 민주화운동단체 기부나 변호사 비용 지급 등에 쓰고 남은 돈으로는 작은 텃밭이 딸린 자그마한 전원주택을 양평에 짓기 시작했다. 세 자녀도 서울에 각각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2011년 1월 대법원이 모든 걸 바꿨다. 사형수 관련 손배소는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의 항소 포기로 1심 판결이 확정된 반면, 이씨 등 생존 피해자들 사건에선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옛 중정)이 항소했기에 재판이 이어졌다. 2심은 1심을 유지했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과거사 사건이라는 이유로 30여년치 이자를 삭제하고 원금만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통상 위자료의 지연손해금(이자)은 불법 행위 시점부터 발생하지만, 장시간이 흘러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을 땐 예외적으로 사실심(2심) 변론종결 당일부터 지연손해가 발생한다고 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자 기산점은 1975년 4월에서 2009년 11월로 늦춰졌다. 그 결과, 이씨 등 피해자 16명과 가족 등 총 77명에 가지급된 491억원 중 211억원이 국가에 반환돼야 할 돈이 됐다. 이씨 개인도 순식간에 4억9,600만원(가족 포함 12억8,000만원)의 채무가 발생했다.

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 떴다. 2013년 7월 국정원은 피해자와 가족 77명 전원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다. 이송우 시인은 이 대목에서 크게 분노했다. “부당이득금이라는, 대단히 모욕적인 표현을 썼어요. 인격 살해이자 ‘경제적 고문’을 가한 겁니다. 저는 이것도 국가폭력이라고 봐요.” 가해자인 국정원이 채권자의 탈을 쓰고, 국가폭력 희생자를 ‘부당한 이득’을 챙긴 파렴치범으로 몰아붙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정원이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제시한 이상, 법적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국정원은 모든 소송에서 이겼다. 연체이자율도 연 5%에서 연 20%로 껑충 뛰었다.

1970년대 유신 정권이 조작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피해자 이창복(가운데)씨가 지난 3일 경기 양평군 자택 앞에서 부인 박인순(왼쪽)씨, 장남 이송우씨와 함께 서 있다. 2009년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으로 여생을 보내고자 마련한 이 집은 현재 강제경매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 2013년 국가정보원이 대법원의 ‘배상금 감액’ 판결(2011년)을 근거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이씨 재산을 압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현재 이씨의 채무는 11억원대에 이른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1970년대 유신 정권이 조작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피해자 이창복(가운데)씨가 지난 3일 경기 양평군 자택 앞에서 부인 박인순(왼쪽)씨, 장남 이송우씨와 함께 서 있다. 2009년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으로 여생을 보내고자 마련한 이 집은 현재 강제경매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 2013년 국가정보원이 대법원의 ‘배상금 감액’ 판결(2011년)을 근거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이씨 재산을 압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현재 이씨의 채무는 11억원대에 이른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가해자 국정원 ‘경제적 고문’까지 

이씨 가족은 이제 국가의 ‘빚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 2018년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본업이 회사원인 이 시인은 국정원의 빚 독촉에 결국 반환금 전액을 납부했다. 그는 “가지급받은 3억6,500만원 중에서 2억1,000만원을 토해냈다”며 “반환을 요구받은 원금에다 이자가 좀 붙은 금액”이라고 말했다. 대출을 받고 집을 팔아서 서울을 떠났다. 누나의 경우, 원금은 갚았지만 나날이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2011년부터 이명 현상이 심해지더니 끝내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했다. 지불 능력이 없는 동생은 빚만 계속 쌓이고 있다. 삼남매는 모두 지방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특히 이씨 부부가 여생을 보내려 했던 양평의 안식처는 언제든 경매에 부쳐질 수 있는 상황이다. 2017년 2~3월 국정원은 이씨의 예금 계좌, 그의 양평 자택 등을 압류했다. 급기야 지난해 5월 13일 관할 법원에선 양평 집 강제경매 절차를 개시하겠다며 1차 매각기일(5월 29일)까지 통보했다. 이 시인은 “당시 굉장히 위급했었다”며 “부동산 강제경매 집행을 불허해 달라는 청구 이의 소송을 냈고, 매각기일 일주일 전에 비로소 경매 절차가 중단됐다”고 했다. 급한 불은 끈 셈이다. 그러나 국정원에 반환금을 내지 못한 다른 피해자 가족이 경매 집행으로 집을 잃은 사례가 있고, 청구 이의 소송 1심도 지난해 11월 패소했다는 점에서 이씨 측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인다.

현재 이씨가 국가에 진 빚은 11억원을 훌쩍 넘은 상태다. 애초 국가한테 받은 가지급금보다도 많아졌다. ‘살인적인’ 이자율 탓이다. 인터뷰 내내 침묵을 지키던 이씨가 입을 열었다. “형사보상금도, 정신장애 판정 관련 민주화 운동 위로금도 안 받았어요. 어차피 국가 예산인 만큼 손해배상금으로 족했어요. 그런데 국가(국정원)가 고리대금업자처럼 연 20%의 고율을 붙여 인생을 끝까지 망가뜨리려고 하다니요. 이런 부도덕한 국가가 있을 수 있는 건가요.”

이창복씨가 ‘부동산강제경매’ ‘채권압류’ 등 최근 수년간 법원에서 전달받은 강제집행 관련 우편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이창복씨가 ‘부동산강제경매’ ‘채권압류’ 등 최근 수년간 법원에서 전달받은 강제집행 관련 우편물들을 살펴보고 있다. 양평=왕태석 선임기자

사실 이씨 가족은 문재인 정부에 희망을 품었다고 했다. 특히 작년 1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 표명’ 결정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인권위는 “국가가 법원 판결을 이유로 인혁당 피해자 구제 책임을 외면한 채 강제집행 방법으로 경제적 고통을 가하는 현 상황은 올바른 반성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고 국정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국가는 ‘적절하고 신속한’ 피해 구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사법부 판단과는 별개로, 대통령이 근본적 해결 방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아무런 후속 조치가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피해자 단체와 수시로 소통해 요구사항을 듣고 있고, 관련 부서 협의 및 내부 검토를 계속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 언급은 피했다. 현재로선 뾰족한 해결책 마련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예컨대 일각에서 거론되는 국가의 채권 포기는 채권관리법상 근거 조항이 없다는 게 문제다. 배임 논란으로 불거질 게 뻔해 청와대도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경호 4ㆍ9재단 사무국장은 “청와대의 고민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결국은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서 청와대와 국정원의 ‘결단’을 주문했다.

이씨도 “청와대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명절 때마다 청와대가 술과 과일을 보내오지만, 오히려 마음만 더 아프다”며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던 분(문재인 대통령)이라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정치적 고려 때문에, 또는 과거 기득권 세력한테서 공격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올바른 일을 안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겁한 게 아닐까요.” 인혁당 피해자와 국가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선 국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열쇠는 바로 현직 대통령이 쥐고 있다.

양평=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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