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동물원의 퓨마 뽀롱이는 사육사 부주의로 열린 문 밖으로 나와 4시간 동안 철창 밖 세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사살됐다. 동물원 폐지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2018년 9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한국의 마지막 북극곰 통키가 에버랜드에서 숨을 거뒀다. 통키는 북극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24년을 살았다.
2019년 여름. 동물원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증강현실(ARㆍAugmented Reality) 기술을 이용한 ‘동물 없는 동물원’. 올림픽공원 잔디밭에 집채만 한 비룡이 나타났다. 비룡은 거칠게 포효하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 관람객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상상의 동물 비룡을 재현하는데 성공한 SK텔레콤은 올해 상반기에 현실의 동물, 북극곰을 재현할 예정이다.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을 혼합해 실감 있는 영상을 구현하는 혼합현실(MR), 동물의 털을 실제처럼 표현하는 초실감 영상 변환(Realistic Rendering) 등 최신 미디어 기술은 온난화로 사라져 가는 북극곰을 털끝 하나까지 생생히 재현한다.
AR 동물원, 홀로그램 동물원 등은 해외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됐다. 쇼핑몰에 갑자기 바다가 펼쳐지고 돌고래가 첨벙거리며 헤엄치는가 하면, 코끼리와 기린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가상 동물원은 기존 동물원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한다. 살아있는 동물을 가두지 않으면 퓨마 뽀롱이의 경우처럼 사살될 일이 없다. 북극곰 통키처럼 서식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평생 고통 받을 일도 없다. 동물원 사육에 ‘적합한’ 야생동물은 없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극 지대에 사는 북극곰, 행동반경이 넓고 무리생활을 하는 코끼리, 지능이 높고 자의식이 있는 침팬지, 돌고래 같은 동물들은 더욱더 부적합한 동물로 꼽힌다.
십여 년 전, 방송을 위해 미국의 동물원 몇 곳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동물복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생태 동물원들이었다. 북극곰 전시장은 상당히 넓었다. 그런데도 북극곰은 같은 구간을 왔다 갔다 하는 이상행동을 하고 있었다. 전시장이 아무리 넓다 한들, 광활한 북극의 빙하를 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릴라 전시장은 유인원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인공 나무와 밧줄 등 복잡한 구조물로 돼 있었다. 이 정도면 동물복지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 싶었다. 그런데 구석에 고릴라 한 마리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사육사는 우울증에 걸린 고릴라라고 했다. 야생동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동물원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딜레마를 갖게 된다. 가상 동물원은 이 딜레마에서 자유롭다.
더구나 가상 동물원의 동물들은 활발히 움직이며 관람객 코앞까지 다가와 눈동자를 마주치는 등 상호작용(interact)이 가능하다. 기존 동물원의 많은 동물들이 우울증에 걸려 멍하니 있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훨씬 짜릿한 체험이다. 또, 단순히 동물만 재현하는 게 아니라 서식지까지 재현하기 때문에 관람객은 진짜 야생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충청북도가 미래해양과학관을 추진 중이다. 혹시 살아있는 해양 동물을 전시하는 아쿠아리움을 짓는 것인지 걱정되어 관계부처에 확인하니, AR, VR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하여 바다를 재현할 예정이라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물고기를 관람객이 만지는 ‘터치 풀’이 계획에 있다 한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손에 만짐을 당하는 물고기들이 온전할 리 없다. 이런 ‘체험’ 시설은 교감이 아닌 학대 시설로 지탄받는 요즘이다. 미디어 기술을 이용한 미래 지향적인 첨단 동물전시 사례로 꼽힐 수 있는데 굳이 시대착오적인 터치 풀을 넣을 필요가 있겠는지 정중히 담당자에게 의견을 드리니 적극적으로 계획 수정을 고려하겠다고 한다.
멸종위기종 보전센터 역할을 하는 일부 동물원을 제외한 현존하는 대부분의 동물원은 19세기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이색 동물을 인간의 눈요기를 위해 수집, 전시하는 동물원은 첨단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동물원으로 진화할 때가 되었다. 2020년이다. 황윤 (영화감독, <사랑할까, 먹을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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