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안적 사실’에 관하여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2017년 1월 미국 백악관의 션 스파이서 대변인이 언론 브리핑에서 ‘매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인원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행사 당일 근처 지하철역의 승하차 인원은 42만 명으로, 오바마 취임식 때의 32만 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인용한 수치는 아무 근거 없이 멋대로 꾸며낸 것이었다. 현장을 찍은 항공사진도 트럼프 취임식의 참석자가 오바마의 것보다 훨씬 적었음을 보여준다.
◇대안적 사실은 ‘사실’ 아닌 ‘거짓’
그 유명한 사건은 다음날 열린 ‘기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났다. ‘대변인이 왜 거짓말을 하냐’는 저널리스트의 추궁에 캘리언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대변인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말한 것뿐입니다’ 저널리스트가 곧바로 반박을 했다. “이 보세요, 대안적 사실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냥 거짓일 뿐이지요.”
‘대안적 사실’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그 말을 그저 변명의 수사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표현은 동시에 디지털시대에 등장한 어떤 중요한 경향을 가리키고 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거짓도 ‘대안적’ 의미에서 사실이 된다. 가령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체험을 할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나마) 허구를 대안적 사실로,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인다.
닌텐도 Wii로 테니스를 치려면 가짜를 진짜로 대해줘야 한다. 플레이어는 진짜 테니스 코트에 있는 양(as if) 온 몸으로 라켓을 휘둘러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게임에 몰입해도 플레이어는 그것이 현실이 아닌 대안적 현실임을 의식한다. 그런데 만약 그 대안이 너무 강렬해 플레이어가 현실로 착각할 정도라면 어떻게 될까.
◇사실보다 강렬한 허구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서 교수가 자기 딸의 대학 입시를 위해 총장의 표창장을 위조했다. 그녀가 위조한 것은 표창장만이 아니었다. 딸과 아들의 상장과 수료증 일체를 위조하거나, 혹은 허위로 발급했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 이미 학교에는 그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것이 동양대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즉 사실(fact)이다.
하지만 학교 바깥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표창장은 진짜이고, 총장이 거짓말을 했으며, 그 배후에는 자유한국당과 검찰권력이 있다. 이들 적폐세력이 개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법무장관을 공격했으며, 정경심 교수는 그 더러운 음모의 순결한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학교 ‘밖’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사실, 즉 ‘대안적 사실’이다.
문제는, 존재하는 ‘사실’보다 허구에 불과한 ‘대안적 사실’의 효과가 더 강렬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것이 허구임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내가 학교를 그만둬야 할 정도였다. MBC의 ‘피디수첩’, TBS ‘뉴스공장’, ‘유시민의 알릴레오’, ‘오마이뉴스’ 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친여 매체들이 이 ‘대안적 사실’의 제작과 유포에 가담했다.
◇사실은 제작되는 것
왜 그랬을까. 그들 모두 정경심 교수의 거짓말에 속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표창장이 위조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보도에서 뭘 드러내고, 뭘 감추려 했는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김경록씨 녹취록을 공개할 때 유시민씨는 그가 “내가 봐도 증거인멸이 맞죠”라고 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뺐다. 감추어야 할 사실의 존재를 알았다는 얘기다.
유시민씨는 이미 동양대 표창장이 위조임을 알았다. 내가 알렸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그가 취한 태도였다. 표창장이 실제로 가짜라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안적 사실’을 제작하여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아무 걱정 말라’고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의 어원은 라틴어 팍툼(factum)이라고 한다. 팍툼은 ‘제작된’이라는 뜻. 결국 사실은 ‘제작되는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유시민씨가 가진 ‘사실’의 개념은 여기에 가깝다. 다시 말해 내게 사실이란 ‘이미 일어난 일로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유시민씨에게 사실이란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고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는 것’인 셈이다.
◇대중은 기만을 원한다
유시민씨와 친여 매체들은 과연 대안적 사실을 ‘사실’로 제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럼 이들은 독자나 청취자들을 기만한 것인가.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물론 그들의 독자나 청취자 대다수는 여전히 표창장이 진짜라 믿는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표창장이 위조임을 안다. 다만 자신들이 이 대안적 사실을 현실에 등록하는 투쟁을 하는 중이라 믿을 뿐이다.
이것을 그들은 사실을 날조하는 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실천’으로 이해한다. ‘표창장이 위조’라 말하는 이들은 현실의 변화에 도움이 안 되는, 아니 대안의 실현을 방해만 하는 ‘입진보’일 뿐이다. ‘표창장이 위조’라 말하는 것은 너 하나의 잘난 척일 뿐, 그것으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표창장이 진짜인 대안적 사실을 실현하는 실천가들이다.
대중의 상당수는 유시민, 김어준 같은 선동가들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거기에 속아주고 있다. 자기부터 솔선해서 속아야 제 주변의 대중들도 따라서 속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선동가들의 말에 속거나, 최소한 속은 척 해줄 때 그들이 제작한 대안적 사실, 다시 말해 ‘표창장이 진본’인 가능세계는 정말 현실이 되는 것이다.
◇집단의 꿈은 현실이 된다
사실 이 장면은 어디서 본 듯하다. 황우석 사태 때 대중들이 어느 오스트리아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한 적이 있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저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이 된다.”(훈데르트바서) 비록 줄기세포가 없어도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없는 줄기세포가 존재하는 가능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원래 이 말은 창조적인 맥락에서 사용됐어야 했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지면 6개의 눈 중 하나가 실현된다.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 부른다. 하지만 주사위에는 비록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직 실현될 수 있을 5개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그 잠재성의 지대를 ‘버추얼’(virtual)이라 부른다. 버추얼이 그저 가짜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디지털의 현실도 한때는 한갓 잠재성, 즉 스티브 잡스 같은 IT그루들의 상상으로 존재했다. 그 꿈이 어느새 현실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오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기술로 실현하는 능력을 ‘기술적 상상력’이라 부른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이 기술적 상상의 뜨거운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을 선동가들은 매우 반동적 방향으로 오용하고 있다.
◇기술적 상상력은 미래를 위한 것
기술적 상상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그것은 더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의 비전을 이 사회에 실현화하는 목적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동가들은 대중이 가진 기술적 상상의 욕망을 흘러간 과거로 데려가, 이미 벌어져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고 은폐하고 변명하는 가망 없는 노력에 낭비하게 만든다.
꿈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망은 이 땅을 더 정의롭고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로운 세계로 만드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선동가들은 대중이 가진 이 기술적 상상의 욕망을 악용해 공정과 정의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의견이 다른 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회를 두 편으로 갈라 아마겟돈의 결전을 연출하고 있다.
그들의 준동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아직도 이 사회에서는 선동가들이 제작한 ‘대안적 사실’이 현실의 행세를 하고 있다. 대중은 그들의 허구를 자신의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막연히 깨달은 이들도, 아직 그 꿈을 굳이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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