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기복 많았던 배우 최민식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극단 뿌리의 연구생으로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을 때의 최민식(58)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대일고교 시절 하길종(1941~1979) 감독의 영화에 감동받고 연출을 꿈꿨던 청년은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두고두고 은사로 존경하게 되는 안민수 교수 아래에서 정극 연기를 배우며 진로를 바꿨다. 매일을 소극장에서 살다시피 할 만큼 연극에 몰두한 수업의 나날이었다. 배우 경력 초년부터 최민식은 남다른 연기력으로 주변의 선망을 받았던 인재였다. 연극 ‘에쿠우스’의 주인공 앨런 역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땐 군 입대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최재성에게 넘겼지만, 6년 뒤 다시 이 작품의 주연으로 무대에 올라서 호연을 펼쳐 큰 인상을 남겼다.
◇연극 연기에 몰두했던 청년
첫 영화배우 데뷔작은 이문열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박종원 감독의 ‘구로 아리랑’(1989)이었다. 동국대 4학년 재학 때였는데 마침 학교 선배이자 나중에 ‘썸머타임’(2001)을 연출하는 박재호 감독이 조감독으로 들어가 있었던 터라 그의 권유로 오디션을 보게 됐다. 당시 출연료 150만원은 서울 한남동에서 자취하면서 연극만 붙잡고 있던 최민식으로선 큰돈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방해하는 프락치 진석 역을 맡았다. 젊은 최민식에게 막 대면한 영화 현장은 낯선 신세계였다. 무대에 오르면 긴 호흡으로 쭉 달리는 연극과 달리, 짧게 끊은 컷을 모아 전체의 감정과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영화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나는 늘 한이 있는 사람, 삶에 기복이 많은 사람, 곡절이 있는 사람, 세련된 사람보다 약간 덜떨어진 듯하고 젠체하지 않는 사람이 편하다. (중략) 해외 입양된 딸과 알코올 중독자 엄마가 만나는 장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 그런 처절한 한의 시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어색한 감정과 말과 일그러진 얼굴과 눈물이 내겐 큰 공부가 된다.” (패션지 보그 2003년 11월호 인터뷰)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다룬 ‘구로아리랑’은 24군데가 심의로 잘려 나가고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 있던 아세아극장에 걸렸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때 시위 장면을 찍으면서 단 한 푼의 출연료도 받지 않고 엑스트라로 열연해 준 신애전자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모습은 최민식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영화 연기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최민식은 장길수 감독의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에서 주인공인 법대생 형빈(손창민)의 미대생 친구로 출연했는데, 연기를 놓고 감독과 크게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술을 전공한 형과 지인들의 모습을 관찰해 의상에 나름의 설정을 넣을 만큼 열심이었다.
◇스크린 안착까지 긴 시간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1989)은 최민식을 스타덤으로 올린 출세작이었다. 극중 ‘꾸쑝’으로 불리는, 이휘향의 아들 배역은 원래 윤다훈이 맡기로 내정돼 있었으나 신인 기용을 고집한 작가 나연숙의 의견이 반영돼 최민식에게 돌아갔다. 거친 반항아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꾸쑝을 선 굵은 메소드 연기로 소화해 내면서 최민식은 생애 처음으로 인기를 누렸다. 연극으로 한 달 50만원 받으면 다행이었던 무명 배우 신세에서 광고 한 편에 700만원을 받는 탤런트로 몸값이 치솟았다. 그러나 인기는 배우로서 최민식의 성장에 위기로 작용했다. 같은 대학 1년 후배인 한석규와 함께 출연한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 순박한 시골 청년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기까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들은 시청률에서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MBC 드라마 ‘그들의 포옹’(1996) 촬영 중에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고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젊을 때는 실수한 작품도 많았고 타성에도 젖었다. 매일 방송국으로 출근해서 대본 들춰 보고 오늘 내가 나오는지만 확인하면서 일수 찍듯이 살았다. 대사 한 마디만 있어도, 병풍처럼 서 있어도 그날 출연료는 나왔으니까. 그렇게 7, 8년을 살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망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진의 연극 ‘택시 드리벌’에 출연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에서의 김 선생 역 외에는 영화에서의 활동 또한 신통치 않았다. 프랑스 로케이션 촬영작인 ‘우리사랑 이대로’(1991)는 본인도 지우고 싶은 흑역사였고, 특별출연이었지만 정작 포스터에는 가장 크게 얼굴이 박힌 ‘사라는 유죄’(1993)는 함부로 작품을 고르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을 뿐이었다. 유현목 감독의 ‘엄마와 별과 말미잘’(1995)에 출연한 후 그는 4년간 영화를 멀리하며 보냈다. 한동안 영화 현장과 거리를 두던 최민식을 다시 카메라 앞으로 이끈 건 후배 한석규였다. ‘은행나무 침대’(1996)의 흥행 성공과 ‘초록물고기’(1997)에서의 연기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는 최민식에게 다시 영화를 하지 않겠냐고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해야지. 너만 하냐?” 그렇게 송능한 감독의 ‘넘버 3’(1997)에 합류한 최민식은 다혈질의 검사 마동팔 역을 맡아 불 같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스크린에 돌아왔다. 연이어 출연한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1998)을 기점으로 그는 방송 활동을 접고 영화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로 최민식은 연기파 배우로서의 카리스마를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키게 된다. 앞서 ‘조용한 가족’에 삼촌 역할로 출연하면서 80㎏까지 살을 찌웠던 그는 각이 진 북한 특수 공작원의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기 위해 갈비뼈에 금이 갈 만큼 지독한 액션 훈련과 감량에 들어갔고, ‘저 유명한 최민식의 햄버거론’(영화 속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알 리가 없지’라는 대사ㆍ책 ‘박찬욱의 몽타주’)을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토해 내며 박무영 캐릭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냈다.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1999)에서는 불륜을 저지른 아내에 대해 복수하는 남편의 서늘함을 큰 동작의 연기나 열변 없이 표현해 냈고, “‘걸레’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새싹처럼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라 요약한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2001)에선 자신을 사랑해 준 여자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한 남자의 초상을 절절히 그려내 제22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올드보이’ ‘명량’… 한국 영화 얼굴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2002)에서 화가 오원 장승업으로 분해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선보인 최민식의 연기 경력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로 절정에 치닫는다.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오대수 역을 맡은 그의 연기를 두고 “‘마라톤 맨’(1976)에서 나치 전범 치과의사를 연기한 (영국 유명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를 평범한 치과의사로 보이게 할 정도의 광기를 지녔다”는 찬사를 보냈고, 최민식은 2004년 한 해 국내 모든 영화상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연기 외에도 최민식은 2005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해 옥관문화훈장을 반납하고 1인 시위를 하는가 하면, 한국군 이라크 파병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도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활발한 사회 참여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스크린쿼터 반대 시위 때 수입차를 끌고 나온 모순, 대부업체 리드코프의 광고 모델로 나선 일은 진지한 배우라는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지만 연기 전선에 이상은 없었다.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 4년간의 공백기를 보내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2009)으로 복귀한 그는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연쇄살인마 배역에 몰입했고,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2012)과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에서도 달인의 솜씨를 선보이며 영화의 성공을 견인했다.
그런 최민식에게도 충무공 이순신 역할은 커다란 장벽이었다. ‘난중일기’를 정독하며 실존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했지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어떻게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가 있지”라는 생각에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최민식은 백척간두의 위급함을 앞두고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던 이순신의 심경에 다가가고자 했고, 그렇게 임한 ‘명량’(2014)은 1,716만명이라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세우게 된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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