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What] 경제개혁연구소, 18년 동안 기업 총수에 대한 형사재판 분석
“기업인 실형 받으면 주가 나빠진다는 건 공포 마케팅일 뿐”
“국내 및 해외공사 수주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여 국위선양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범죄를 저질러 형사재판에 넘겨진 기업을 다루는 재판부의 발언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라는 이유는 곧 참작 사유가 되어 기업인의 범죄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결과를 낳게 되죠. 또 재벌 총수가 감옥에라도 가게 되면 기업 경영은 누가 하냐며 호들갑을 떠는 일도 흔합니다. 총수가 감옥가면, 정말 기업이 흔들흔들 위태로워질까요?
시쳇말로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죠. 재벌 총수가 감옥에 들어가는 여부와 해당 기업의 주가 등락을 비교한 연구가 있습니다. 경제개혁연구소의 이창민 한양대 경영대 교수, 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가 13일 발표한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는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보고서입니다.
◇총수가 유죄판결 받은 35개 기업집단 319개 계열사 주가 분석
연구진은 “총수에 대한 처벌이 해당 재벌그룹 및 국민경제 전체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을 “공포 마케팅”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공포 마케팅에 당했다는 걸까요? 연구진은 2000년부터 18년 동안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총수가 지배하는 35개 기업 집단, 319개 계열사를 대상으로 법원 판결이 기업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사건분석방법론으로 분석했습니다.
여기서 기업 가치란, 유죄 선고 전후 15일 동안 계열사들의 누적 비정상주식수익률, 쉽게 말해 주가에 미치는 영향을 뜻하는데요. 기업 총수의 유죄 여부가 주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본 겁니다.
그 결과 법원의 유죄 선고는 계열사의 주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연구진은 기업 총수가 처벌을 받을 상황, 사법 처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주가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실형 선고가 날 경우, 평균 누적비정상주식수익률은 -0.6%(3요소 모형) 또는 -0.01%(4요소 모형)였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숫자라고 합니다.
◇“집행유예가 실형 선고보다 주가에 더 나빠”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총수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 주가에 부정적 반응을 가져오는 요인은 총수에 대한 실형 선고가 아니라 오히려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라는 건데요. 집행유예 선고에 대한 평균 누적비정상수익률은 -1.4%(3요소 모형) 또는 -3.0%(4요소 모형)로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숫자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집행유예 선고가 나면 주가가 평균적으로 최대 3% 떨어진다는 거죠. 연구진은 이를 두고 “재벌 총수가 실형 선고를 받으면 기업 가치가 하락한다는 말은 ‘실증적 근거가 빈약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이라는 점이 확인됐다”고 해석했어요. 한마디로 공포 마케팅이 맞다는 말이죠.
총수가 집행유예로 풀려 나와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게 기업 가치에 악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뭘까요? 이는 시장 참여자들이 ‘규율의 부재’를 깨닫기 때문이라네요.
연구진은 “총수에 대한 실형 선고는 전횡에 대한 견제 장치로 기능해 이후 지배구조 개선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기업 가치에 긍정적일 수 있다”며 “반대로 법원이 관대한 판결(집행유예)을 내릴 경우 총수의 사적 이익 추구가 계속돼 궁극적으로 기업가치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범죄를 저지른 총수가 마땅한 죗값을 치르거나 그에 대한 책임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기업 경영 측면에서는 더욱더 긍정적이라는 뜻이에요.
최 교수는 기자와 통화에서 “총수가 재판을 받을 만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대다수 지배권 유지를 위해 계열사를 이용하는 행위”라며 “사법부가 이를 관대하게 여기는 것은 주주들, 시장에게 ‘한국 사회에선 법원이 총수의 사익 추구 행위를 견제할 수 없다’라는 신호가 되고 이는 곧 리스크 요인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기업인의 경제 기여도, 판사가 신경 쓸 문제 아냐
법정에 선 재벌 총수 중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일 겁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2018년 2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고 석방됐는데요. 하지만 대법원이 지난해 8월 뇌물액을 추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내 이 부회장은 2심 재판을 다시 받고 있어요. 문제는 ‘당시 판사의 이례적인 당부가 과연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남는다는 건데요.
지난해 10월 25일 이 부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정준영)는 재판 말미에 “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인 준법 감시제도가 작동되고 있었다면 이 사건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내부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하라고 제안한 것을 두고 말이 나오는 겁니다.
연구진은 재판부의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하라고 한 제안 자체가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집행유예 선고의 전제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읽힌다”고 비판했는데요. 최 교수는 “준법감시제도에 앞서 기존 사외이사나 감사 등 견제장치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게 학계에서 동의하는 바”라며 “특히 준법감시제도의 경우 설립 과정은 물론 권한이나 책임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아 결국 ‘보여주기 식’에 그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총수를 인간적인 감정 없이 내 돈을 벌게 할 또는 잃게 할 요인으로 보는 건 바로 주주라는 겁니다. 최 교수는 “총수가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은 실제 이해관계 당사자인 주주들”이라며 “재계나 언론의 반응보다 돈을 투자한 주주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도 이 같은 이유”라고 밝혔습니다.
또 재판부가 엄격하게 판단해 기업 총수에게 실형을 선고해도 정말 경제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면 사면 받을 여지가 있다는 점도 고려를 해야 하는 부분인데요. 최 교수는 “만약 총수가 기업 경영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으면 대통령이 사면하면 되는데, 사법부가 이 중요 여부를 판단할 경우 국민이 심판할 기회조차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공은 재판부에 넘어갔습니다. 시장의 부름에 재판부는 응답할까요? 이 보고서를 읽는다면 적어도 “총수의 부재로 기업 경영이 악화해 국민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크다”는 논리는 다소 무리수가 될 수 있다는 건 알아야겠습니다.
이정은 기자 4tmr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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