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이래서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 하려고.”
2016년 출간된 ‘82년생 김지영’ 소설 속 김지영은 아이를 데리고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셨다는 이유로 ‘맘충(아기 엄마를 비하하는 모성 혐오 표현)’이 된다. 현실도 다르지 않다. 소리지르며 가게를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어하지 못하거나, 평일 낮에 카페나 백화점을 들른 주부들에게도 여지없이 혐오의 딱지가 붙는다. ‘전업주부=놀고 먹는 비생산적 팔자 좋은 존재’로 바라보는 편견 때문이다. 전업주부들이 매일 겪는 전투에 가까운 가사노동과 육아의 고통은 하찮은 일로 치부된다.
한국 사회에서 전업주부가 늘 혐오의 대상으로 그려졌던 건 아니다. 1980, 1990년대 미디어는 중산층 전업주부를 교양을 겸비하고 가정의 경제권까지 획득한 부러움의 대상으로 조명했다. 당시 전업주부는 “집안일도 직업”이라며 가사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낼 만큼 당당했다. 반면 직장에 나가는 워킹맘(취업주부)은 자아실현을 위해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철딱서니 없는 부정적 존재로 여겨졌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은 이 같은 간극이 왜 발생했는지, 여성혐오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그 기원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저자는 박찬효 이화여대 국문과 강사로,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신문 기사, 소설, 드라마, 영화에 재현된 여성혐오 양상을 추적했다.
한국에서 여성혐오는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여성은 늘 혐오의 대상이었다. 다만 시대에 따라 그 타깃이 달라졌을 뿐이다. 여성 혐오 담론을 만들어낸 이유는 단 하나. 가부장제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다. 저자는 “여성혐오는 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기존의 가부장제를 포기하고 새로운 가족이데올로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미디어는 국가와 사회 정책 변화에 따라 재편된 여성혐오 담론을 주조하고, 퍼 나르는 데 충실했다.
1950, 1960년대 여혐의 대상은 ‘여대생’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시절 여대생은 호기심과 질투의 대상을 넘어 혐오집단으로 배치됐다. 저자는 사회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였기 때문이라 풀이한다. 그 결과 여대생은 바람 난 취업 주부보다 더 정숙하지 못한 여성의 대명사로 그려졌다.
이혼녀에 대한 시선은 시대마다 급변했다. 여성의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웠던 1950, 1960년대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여성은 연민의, 불륜을 저지른 남성이 질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모범적’ 가부장을 강조하던 1980, 1990년대 들어와선 이혼녀는 단란한 가족을 무너뜨리는 최대의 적으로 간주된다.
이혼녀가 긍정적으로 그려진 건,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부터다. 독립적인 경제 활동으로 아이를 키우는 생활력 강한 이혼녀가 부각됐다. 이와 동시에 워킹맘의 이미지도 급격하게 달라졌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능력자로 포장된 것이다.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 받던 이혼녀와 워킹맘이 환영 받게 된 데는 ‘경제활동’이란 공통분모가 있었다.
가장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고, 자녀의 교육과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불안감으로 출생률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가정을 지탱해나가는 핵심 인력으로 포섭된 것. 반면 전업주부는 남편에 기생하는 존재로 격하됐다.
책은 풍부한 자료와 익숙한 드라마, 영화를 사례로 들며, 국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폐기되고를 반복했던 여성혐오의 변천사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여성혐오 문제를, 성별 대립으로 끌고 가지 않으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책은 한국의 가부장제 질서가 어떻게 변모돼 왔는지를 살피며 ‘가장’의 모습도 빼놓지 않는다. 남성 역시 가족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데 동원된 희생자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저자는 오늘날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배경을 두고 남남 갈등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라는 점을 꼬집는다. 여성 혐오 이슈를 주도하는 집단은 주로 20대, 아직 취업을 못한 남성들로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여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달라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그들이 경쟁에서 진 것은 또 다른 남성 때문이지, 여성 때문은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무리 여성의 위치가 신장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부와 권력,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한 경쟁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남성 간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간과한 채 여성에게 분풀이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박찬효 지음
책과 함께 발행ㆍ564쪽ㆍ3만3,000원
여성혐오는 또 어디로 향할까. 저자는 전업주부와 워킹맘의 갈등을 꼽았다. 미디어가 전업주부에 대한 혐오와 워킹맘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사이 여성 간 관계는 더욱 분열될 것이란 예상이다. 특히 엄마가 얼마만큼 경제적 기여를 하는가가 능력으로 간주되면서 모성 경쟁이 더 심화될 것이라 우려한다. 혐오의 전선은 더 조밀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그럴수록 현실과 환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워킹맘이 추앙 받는다 해도, 여전히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어려운 게 현실 아닌가. 전업주부 역시 직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건 부당하다.
지난 역사에서 확인했듯 여성은 누구든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혐오를 피하고 싶다면, 혐오의 싹을 끊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나부터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책은 힘주어 말한다. 잊지 말자. 가부장제는 여성혐오를 먹고 자라왔다는 사실을.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 간의 혐오 폭탄 돌리기가 이어질수록 남녀 모두를 억압하는 가부장제 질서만 더욱 공고해질 뿐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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