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기 세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품었던 공산주의에 대한 ‘집단 황홀경’의 바탕에 지적 체계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미학적 매력 외에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윤리이자 사명이었고, 공동선의 대안이었다. 노년에 쓴 회고록 ‘미완의 시대’에 그는 그 열정을, 한 극작가가 썼다는 ‘원탁의 기사들’ 속 성배의 추구에 비유했다. “세상 사람들은 성배와 원탁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사람들에게 원탁의 기사는 바보, 멍충이, 범죄자일 뿐이다.” 하지만 아서 왕의 말처럼, 홉스봄에게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였다. 그는 극중 기사 랜슬롯의 말을 인용한다.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 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남미 해방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콜롬비아의 사제 겸 혁명가 카밀로 토레스 레스트레포(Camilo Torres Restrepo, 1929.2.3~1966.2.15)의 삶이 한 전형이었다. 가톨릭 신부였던 그는 토지 귀족 계급과 독재에 맞서 사제의 지위와 특권을 포기하고 총을 든 혁명가였다. 게릴라 콜롬비아 인민해방군(ELN)의 일원으로서 그는 가톨릭 신앙과 맑시즘 이념의 접점을 모색했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에 내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잠시 미사를 집전하며 말씀을 전하는 것을 중단했을 뿐이다.(…) 혁명은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교육을 제공하며 자비를 실천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혁명에 헌신해야 한다.”(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레스트레포 신부는 ELN의 하급 전사로서 정부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그와 유사한 열정으로 1970~80년대 군사정부에 맞섰던 한국의 운동권 주역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권력자가 됐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이미 성배를 찾았고 지금 지키려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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