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연에서 비유를 빼면, ‘사람은 앉아서 생각한다’가 되지요. 그 사람은 3연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해요. 보이는 익숙한 것에서부터, 놓인 사과를 보고 사라진 사과도 생각해요.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옆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마지막 연도 수식을 빼면, ‘그는 존재한다’가 되지요. 그가 존재하는 이유도 “사과” 때문이지요. “대해”는 그것 자체는 아니니까, 생각에 근접하기는 했지만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사과가 놓였던 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존재로 보여요. 그에게 생각이 허락되지 않았어도 말이죠. 우리는 언제쯤 사과처럼 존재하게 될까요. 생각의 방식을 ‘사과에 대해 생각한다’가 아니라 ‘사과를 생각한다’로 바꾸면 가능해질까요? 아무튼 사과가 이겼다, 이 말이지요.
이 시가 들어 있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첫 시집을, 출간보다 먼저 읽어보는 행운이 제게 주어졌었는데요. ‘다름’에 골몰한 흔적들로 가득하지요. “자동사가 위선이라는 걸 타동사는 안다”(‘자정’)로 만들어낸 독특함이 있어요. 흔히 보던 방식은 아니어서 더디게 읽히는데, 읽다 보면 이 ‘외곬의 아름다움’에 설득되지요. “저 사람과 저 사람과 저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오와 아”, “아와 오”는 어떤 차이를 가질까, 이 미세한 다름을 뒤척여보는 것이 시니까요. 이런 섬세한 정확함이 깃들 때 좋은 세계도 탄생하는 것이니까요.
‘순간주의자’인 탓에 시간을 연속적으로 감각하지 않는데요. 손가락을 꼽아보니 시 한 송이는 한 달 모자란 4년 동안 이 자리에 나타났네요. 오늘로 시 한 송이를 그쳐요.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두 손을 모아요. 저도 여러분도 문득문득 ‘시 한 송이’의 순간을 만나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나라는 텍스트에 시의 순간을 깃들게 하면, 세상이라는 텍스트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풍경을 보여줄 거예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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