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짠하다.” “불쌍해서 우짜노.”
2012년 대선 정치부 소속이었던 기자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따라 전국을 누볐다. 어디서나 50대 이상 중장년층은 박 후보에게 호의적이었다.
압권은 TK라 불리는, 대구경북 지역이었다. 반가워하거나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박 후보의 옷깃을 부여잡고 등을 쓰다듬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짠하다” “불쌍하다” 추임새가 들러붙었다.
정치권에선 ‘정치인 박근혜’의 최대 자산은 ‘동정심’이란 평이 나돌았다. 일국의 지도자를 뽑는데 왜 ‘부모 모두 흉탄에 잃은 비운의 가족 스토리’가 거론돼야 하는가 싶었지만, TK에서는 그런 의문 자체가 무의미했다. TK 사람들에게 박근혜는 ‘가련한 공주님’이었다. 탄핵 뒤에도 여전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대구경북의 사회학’은 TK 심리의 핵심으로 돌진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회학자 최종희(57)씨. 경북의 집성촌에서 태어나 50년 넘게 TK 지역을 떠나본 적 없는 TK 토박이다. 1남1녀를 키우며 수필작가로 살면서 TK의 사고방식을 단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쉰을 앞둔 늦깎이 사회학도의 눈으로 살핀 TK는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책은 저자가 지난해 쓴 박사학위 논문 ‘대구경북의 마음의 습속’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TK 민심을 정치적 관점이 아닌 문화이론적으로 들여다 본 게 새롭다. 50~60대 평범한 TK 중산층에서 남성 5명, 여성 5명을 골라 심층면접을 했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지만, 책 또한 어려웠다. 최종희씨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정말 망설였다”고 했다. “TK 토박이인 남편도 싫어하고, 가장 친한 친구한테도 한바탕 욕을 먹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책으로 낸 건 “TK토박이들도 저처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박정희에 열광하고 자유한국당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보수의 성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의 산실. TK란 폐쇄적이고 고지식한,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의 대명사다. 하지만 해방 전후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진보적이었다. 1960년 대구에서 터진 2ㆍ28 민주화운동은 4ㆍ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다. 1960년 이후 TK는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저자는 그 배경을 ‘성찰하지 않는 습속(習俗)’에서 찾는다. TK 사람들의 미덕은 침묵이다. 서로 견해가 다르면 모두 입을 다물고, 개인적 불만은 내색하지 않는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 카니” 일단 기존 질서에 참고 순응하며 대세를 따른다. 안정을 지향하는 보수는 ‘성스러운 양반’이고, 매사 꼬집고 할퀴며 문제제기를 일삼는 진보는 ‘속된 상놈’이란 게 기본 인식이다. 이 같은 집단주의는 가부장제, 공동체주의, 국가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대한 TK 사람들의 반응이 증거다. 대통령으로서의 박근혜가 저지른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촛불집회란 그저 “민주노총 골수분자를 따라 할일 없는 사람들이 모인 것”일 뿐이다. 설사 촛불집회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해도, 집회에 직접 참여할 생각은 없다고 선을 긋는다.
저자는 이를 ‘시민’으로 훈련 받지 못한 탓이라 본다. 시민사회는 개인이 독립적인 주체로 나설 때 성장할 수 있지만, TK 사람들은 ‘시민의 언어’가 아니라 왕조시대를 떠받치는 ‘신하의 언어’에 매몰돼 있다는 지적이다.
TK의 또 다른 습속은 ‘우리가 남이가’란 표현에 녹아 있는 의리, 그리고 체면이다. TK사람들은 배신을 극도로 혐오한다. “한번 좋아하면 영원해야지” “실속만 좇아 다니는 서울사람은 깍쟁이야” 같은 말들은 이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일상에서조차 TK사람들은 새로 개업한 병원보다 낡고 오래된 단골 병원을 찾는다.
정치적으로 보수를 고수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는 없다.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이니까” “살아온 게 그렇게 살았으니까”라는 게 전부다. 변화를 거부하는 폐쇄적 모습에 스스로를 “북한 같다”고 하면서도 고칠 생각은 “없다.”
이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에다 이명박, 박근혜까지, 오랫동안 최고 권력자를 배출해왔다는 우월감 때문이다. 가진 자로서의 당당함이다. 온갖 어려움에도 나라의 중심을 지킨 건 우리였다는, 기득권자로서의 자부심이다. ‘보수’라는 단어는 이들에게 일종의 척화비다.
박정희는 맹목적 순종과 의리, 우월감이란 TK 습속의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TK사람들은 여전히 박정희를 숭배한다. 박정희는 보릿고개를 없앤 경제적 영웅이자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가부장이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인권탄압을 자행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밥을 먹어야 민주주의도 있지” “대를 위해 소는 희생하는 법”이라며 맞받아친다. 도덕적으로 흠집이 있어도 더 큰 업적이 있으니 괜찮다는 사고방식이다. “짠하다” “불쌍하다”는, 박근혜에 대한 TK의 일편단심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영웅 박정희에 대한 추모다.
책을 본 TK사람들은 반발할지 모른다. 이제는 달라졌다고 억울해할 수도 있다. 실제 TK의 2030세대 중 일부는 박정희와 자유한국당에 맹목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TK의 중장년층 중에서도 “그렇게 계속 뽑아줬는데 돌아온 건 하나도 없다”며 야속함을 토로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대구경북의 사회학
최종희 지음
오월의봄 발행ㆍ416쪽ㆍ2만2,000원
저자 또한 그 점은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TK가 변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주변의 냉소와 비아냥이 여전히 두렵고 아프지만, 저자가 이 책을 계기로 TK의 습속에 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평범한 악이 계속 만들어지는 건 성찰하지 않는 습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각하는 걸 넘어 그 틀을 깨려 하는 게 변화의 첫걸음 아닐까요.”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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