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자체가 불법인데 그 불법적인 명단을 전달, 실행, 보고한 공무원들의 행위가 사실상 통상 업무였다고 보는 건 말이 안된다.”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30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대법원 판결을 지켜본 뒤 이처럼 비판했다. 김 교수는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연극 ‘검열’을 최초로 폭로한 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 민간위원으로 참가했다.
김 교수는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공무원들이 1,2심 재판에 출석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증언했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은 문화계뿐 아니라 문체부와 문예위ㆍ영진위 등 해당 기관 공무원에게도 모욕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대법원의 블랙리스트 사건 파기 환송을 두고 문화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법리적 이유로 처벌 근거였던 직권남용죄를 좁게 해석하려는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출판계 블랙리스트로 피해 본 출판사 10여곳을 한데 묶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등 법적 대응을 진행했던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정원옥 정책팀장은 “블랙리스트는 ‘문화적 제노사이드’라 불릴 정도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국가범죄인데 ‘일부 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 정도로 이해한 아주 편협한 판결”이라며 “국가 스스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이해도, 해결한 의지도 없어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퇴임한 뒤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부분도 문화계는 문제 삼았다.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위원장은 “김 전 실장이 퇴직 이후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들을 무시한, 김 전 실장에게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 주장했다. 김미도 교수도 “블랙리스트 작성, 실행을 김 전 실장이 기획했고, 퇴임한 뒤에도 그가 만든 시스템이 그대로 작동했는데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영화계에서도 “참담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영화 ‘말아톤’ ‘대립군’을 연출했던 정윤철 감독은 “대법원 판결은 실행자와 피해자는 있는데 지시자는 없다는 얘기”라며 “윗선 책임을 면제해주는 불합리한 판결”이라 말했다. 조영각 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도 “직권남용은 인정하되 ‘의무 없는 일’ 부분은 다시 확인하라는 건 판결을 미루기 위한 정치적 판단 같다”며 “다시 있어선 안될 범죄에 대한 판결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표향ㆍ라제기ㆍ강지원ㆍ강윤주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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