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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트루스 오디세이] 문재인 정권, ‘촛불팔이’ 중단하라

입력
2020.02.06 04:3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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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촛불정권’이라는 환상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1999년 개봉한 SF영화 ‘매트릭스’.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가상현실이라는 줄거리로 화제를 모았다. 워너브라더스 제공
1999년 개봉한 SF영화 ‘매트릭스’.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가상현실이라는 줄거리로 화제를 모았다. 워너브라더스 제공

‘오늘날 권력의 거짓말은 개별사실을 왜곡하는 식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장 보드리야르(1929~2007)의 말이다. 오늘날 실재는 권력이 날조한 가상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실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안 보이게 됐을 뿐이다. 때문에 가끔 실재계의 요소가 주책없이 가상계로 침투하는 일도 생긴다. 이를 ‘돌발사태’라 부른다. 실재계의 요소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기 마련. 때문에 권력은 그것을 신속히 제거하려 한다. 이를 ‘저지전략’이라 부른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4년 8월 8일 백악관에서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4년 8월 8일 백악관에서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돌발사태와 저지전략

이 생각을 SF로 해석한 것이 바로 영화 ‘매트릭스’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아키텍트가 날조한 세계에 산다. 어느 날 그에게 실재계로부터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것이 돌발사태다. 모피어스 일당은 비록 작은 집단이나, 그 존재만으로도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할 수 있다. 그래서 매트릭스는 이들을 제거하려 한다. 이것이 저지전략이다. 영화에서 그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스미스 요원. 그는 네오 일당을 추적, 제거함으로써 인간들의 수면상태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 가상세계의 관리인인 셈이다.

보드리야르는 저지전략의 실례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제시한다. 이 사건은 원래 미국식 민주주의의 추악함을 폭로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이 사건은 거꾸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예로 기억된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권력이 이 사건을 철저히 ‘개인의 스캔들’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타락한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 개인이라는 것이다. 고로 그만 물리면 권력은 계속 깨끗한 척 할 수 있다. 심지어 ‘대통령도 잘못하면 물러나야 하는 나라’라고 칭송까지 받는다.

미국의 대통령은 아마 누구나 도청을 했을 것이다. 닉슨의 전임자도, 그의 후임자도. 그저 들키지 않았을 뿐, 부패는 권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기자가 폭로해 버렸다. 이것이 돌발사태다. 실재계에서 들어온 요소는 그 존재만으로도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한다. 고로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결국 권력은 그 사건을 닉슨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프레이밍했고, 그로써 자신의 부패한 본질을 감추고, 위대함의 후광까지 얻었다. 이것이 저지전략이다. 권력은 대개 이런 식으로 위기를 관리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버전의 저지전략이라면, 문재인 정권의 위기관리 방식은 성격이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대 정권은 감추려다 실패한 비리사건의 경우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로 치부해, 당사자를 도려내는 식으로 처리해 왔다. 이 정권은 다르다. 그들은 부패한 자들을 도려내는 대신에 외려 끌어안고, 아예 그들에게 맞추어 세계를 새로 날조하려 한다. 거기에 늘 노골적 선동과 대중의 자발적 동원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정권의 전략에는 다분히 전체주의적 구석까지 있다. 민망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2016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사진은 촛불집회가 열린 광장을 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촬영한 것.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2016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사진은 촛불집회가 열린 광장을 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촬영한 것. 한국일보 자료사진

◇매트릭스 리로디드

사실 문재인 정권은 ‘촛불정권’이라 하기 어렵다. 원래 민주당 사람들은 탄핵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국 교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탄핵불가를 외친 바 있다. 먼저 소추안 통과에 필요한 의석이 부족하고, 통과돼도 황교안 당시 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며, 헌법재판소의 구성상 인용을 장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정권 사람들은 원래 ‘촛불’을 든 민중의 힘을 믿지 않았다. 말이 촛불정권이지, 문재인 정권은 이른바 “친노폐족”이 운 좋게 국정농단 사태를 만나 권력을 거저 얻은 것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권력은 자신을 성공적으로 ‘촛불정권’이라 브랜딩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적폐청산의 역사적 사명을 짊어졌다. 개혁의 주체는 자신, 대상은 물론 전(前)정권이었다. 이 작업이 일단락되자 그들은 새로 검찰ㆍ경찰ㆍ법원ㆍ언론을 청산해야 할 적폐로 꼽았다. 청산작업의 논리적 전제는 ‘정권은 깨끗하고 바깥은 더럽다’는 것. 권력이 40%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날조해 심어준 환상이다. 그런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가상 속으로 주책없이 ‘유재수’라는 실재계의 요소가 침투한 것이다.

권력은 신속히 움직였다. 민정수석이 이를 덮었다. 사태는 저지되는 듯했다. 하지만 일개 수사관이 이를 폭로해 버렸다. 그러자 권력은 재빨리 그의 뒤를 캐서 그를 묻어 버렸다. 이로써 사태는 다시 저지되는 듯 했다. 조국 사건도 비슷하다. 그의 아내가 표창장을 위조하다가 발각됐다. 이는 노무현에서 조국으로 이어지는 신통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돌발사태였다. ‘혹시 이 거룩한 분도 실은 적폐가 아닐까?’ 이 의심의 확산을 막으려 권력은 대학총장의 뒤를 캐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도 마찬가지다. 정권의 지지자들은 그런 짓은 ‘이명박근혜’의 적폐정권에서나 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환상을 깨는 돌발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검찰서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사건이 1년 8개월 만에 서랍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권력은 이 일련의 돌발사태들이 무난히 저지되리라 믿은 듯하다. 검찰총장을 세운 것이 바로 자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총장이 하필 윤석열이었다는 것. 그들의 프로그램에서 윤석열은 곧 치명적 버그로 드러난다.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검찰개혁의 프레이밍

이 버그는 그들의 매트릭스에 심각한 기능장애를 일으켰다. 40% 지지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늘 개혁의 주체였다. 그런데 검찰의 수사로 인해 그들 또한 청산의 대상, 또 다른 적폐라는 사실이 폭로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지 권력은 얼마 전까지 개혁의 ‘주체’였던 검찰을 개혁의 ‘대상’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적폐를 청산하던 검찰은 졸지에 적폐로 전락했다. 권력을 향한 수사는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됐고, 그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권력은 지지자들을 서초동으로 불러냈다.

권력은 부패한 자들을 쳐내는 대신에 ‘그들이 무죄인 가능세계’를 창조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려면 일단 대중을 실재로부터 단절시켜야 한다. 이제 권력실세들의 범죄혐의에 대한 보도는 모두 검찰이 ‘기레기’를 통해 흘리는 허위정보로 매도된다. 그로써 그들의 부패는 없었던 일이 된다. 실재에 대한 공격에서는 권력이 사육하는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선동이 큰 역할을 했다. 어느 ‘어용지식인’이 유튜브에서 내뱉은 한 마디에 심지어 지상파 방송의 법조팀이 해체되기까지 했다. 참담한 일이다.

검찰총장을 임명하며 대통령은 그에게 ‘죽은 권력만이 아니라 산 권력에도 칼을 대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 약속이 지켜졌다면 아마 고전적 저지전략의 상황이 펼쳐졌을 게다. 즉 비리에 연루된 이들을 쳐내고 ‘촛불정권’으로써 계속 개혁적인 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들키지만 않았을 뿐 그것으로 정권의 부패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도 말이다.) 그 일로 권력은 위대함의 후광까지 얻을 수도 있었다. ‘보라, 이렇게 산 권력에까지 검찰이 칼을 대도록 허용하는 게 다른 정권과는 구별되는 문재인 정권의 도덕성이다.’

솔직히 나는 ‘촛불정권’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외려 권력이 이 방식을 사용하여 그 환상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했다면 ‘촛불혁명’이라는 권력의 연극을 도울 의향까지 있었다. 하지만 권력은 부패한 자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기들을 맹신하는 40%의 지지자만을 위해 ‘그 부패한 자들이 부패하지 않은 대안세계’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60%의 시민들은 권력이 ‘촛불정권’이라는 번거로운 허울을 벗어 던지고 아예 이익집단으로 제 알몸을 노출하는 민망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권력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대신에 아예 모르기로 한 모양이다. 비리가 비리가 아니고, 부패가 부패가 아니며, 범죄가 범죄가 아니라고 강변하다가 사실과 도덕의 기준마저 무너뜨렸다. 그로써 사회는 논리와 윤리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보편적 혼돈이 시인들의 감성마저 바꿔놓은 걸까.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던 시인은 연탄재를 볼 일도 없을 어느 강남사모님을 위해 이렇게 노래했다.

“나도 강남에 건물을 소유해 앞으로 편히 살고 싶다. 이런 꿈을 꾸는 것이 유죄의 증거라고? 대한민국 검찰은 꿈을 꾸는 것조차 범법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꿈을 꾸지 말자. 미래에 대해, 앞날에 대해, 그리고 다가올 시간에 대해.”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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