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오데 룩소르 극장에 관객 2,000여명이 몰려 들었다. 영화 ‘기생충‘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날 상영된 ‘기생충’은 이전 ‘기생충‘과 달랐다. 흑백 버전의 세계 첫 상영이었다. 로테르담영화제는 흑백 ‘기생충’에 관객상을 안겼다. 국내 1,000만 관객이 본 원조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트로피를 향해 내달릴 때 동생 격인 흑백판이 별도로 트로피 수집에 나선 셈이다. ‘기생충’ 흑백판은 지난달 30일 미국에서 개봉했고, 한국 극장가에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
‘기생충’만 아니다. 이준익 감독은 신작 ‘자산어보‘를 흑백영화로 만들고 있다. 이 감독은 윤동주 시인의 삶을 그린 ‘동주’(2016)를 흑백으로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제작비 5억원을 들이고도 117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했다.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이 섬 청년 창대(변요한)와 우정을 나누며 조선 최초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흑백에 매료된 감독은 또 있다. 원로 임권택 감독도 최근 흑백영화 제작을 모색했다. 임 감독은 2015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폴란드 흑백영화 ‘이다‘를 관람하고 영감을 받아 흑백영화 제작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욱 감독은 화면이 점차 탈색돼 흑백으로 변하는 ‘친절한 금자씨’(2005) 특별판을 선보이기도 했다.
컬러의 시대를 넘어 3D영화가 유행한지도 10년이 된 지금, 왜 흑백영화일까.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 발표에 따르면 흑백영화는 봉 감독의 오랜 꿈이었다. ‘기생충‘이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직후 흑백판을 완성했다. 흑백 전환 비용은 1,000만원 정도였다. 봉 감독은 로테르담영화제 상영회 이후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장 르누아르, 존 포드,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대가들이 흑백영화를 만든 시기가 있었다“며 “우리 세대는 고전영화를 흑백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면 고전영화가 될 것이라는 덧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다. 흑백의 미학적 가능성 또한 고려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 이후 조선시대를 흑백으로 묘사한 영화는 거의 없다”며 “흑백으로 조선의 의복과 궁궐, 남해 바다의 풍경 등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흑백은 색감이 없으니 질감에 공을 들이게 되는데 디지털 4K 카메라로 찍으면 질감을 상세히 묘사할 수 있다’며 “흑백은 배우 연기에 집중하게 하고 인물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보도록 한다”고도 했다. 봉준호 감독도 “영화는 소리와 이미지에 관한 것이라 냄새를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며 “관객은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 후각이 자극 받게 되는데, 흑백영화에선 배우에게 집중하게 돼 냄새가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냄새가 영화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생충’에 흑백화면이 더 어울린다는 주장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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