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만리뷰 기록에 도전하는 ‘기생충
“파라사이토(Parasite의 일본식 발음)가 작품상! 정말 축하해!”
결과가 궁금해서 포털사이트 연예뉴스 페이지를 10초에 한번씩 리로딩하던 그 때, 집에서 편안하게 미국 ABC의 중계방송을 보던 아내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내까지 그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웃음이 삐쳐 나온다. 나 때문에 한국영화를 좋아하게 된 일본인 아내는 나와 극장에서 종종 한국영화를 본다.
지금도 아내의 ‘넘버원 인생영화’는 ‘친절한 금자씨’다. 하필이면 왜 그 영화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재미있는 건 아내는 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관람 당시의 개인적 경험이 있다 했다. 첫 아이 임신 때였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발길질을 하던 뱃속 아이가 금자씨의 시원시원한 복수 장면 때부터 잠잠해졌다고 한다. 영화와는 다소 동떨어진, 작품의 완성도와는 무관한 이런 경험이 때론 인생영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철옹성 아카데미 뚫은 기생충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던 지난 10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사 현장에 있었다. 해체작업 중이었지만 집중은 안 됐다. 나도 한 때 영화 공부하고 영화 일을 했던 사람이어서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렇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절대 우리 손에 닿지 않을 ‘평행우주’ 같았고, 오스카 트로피는 말하자면 ‘인피니티 스톤’이다.
아카데미는 폐쇄적이었다. 넷플릭스를 싫어했고 비영어권을 무시했다. 스페인어 영화 ‘로마’를 만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지난해 감독상에 그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감독상 트로피가 비영어권 혹은 다른 플랫폼에 기반한 영화가 받을 수 있는 상의 한계라 생각했다.
하지만 1년만에 아카데미는 발 빠른 태세전환을 선보였다. 작품상 등 주요 수상작 후보에 넷플릭스 영화가 포진했다. ‘아이리쉬맨’을 내놓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향이 컸지 않을까 싶다. 이제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은 넷플릭스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생충’이다.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했다. 거기다 감독상, 각본상까지 주요 3개 부문을 휩쓸었다. 보통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이 올라올 경우 작품상과 감독상을 나눠주거나, 하다못해 각본상이라도 다른 작품에 줬다. 나름의 균형이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동시에 탄 영화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대부2’ ‘양들의 침묵’ 등 몇 편 되지 않는다.
◇혐한 분위기 속 관객 100만 돌파
‘기생충’의 놀라운 진격은 칸과 로스앤젤레스를 넘어 일본에서도 진행 중이다. ‘기생충’이 개봉한 건 지난해 12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양국 갈등에다 한국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한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기생충’은 그럴싸한 홍보 한번 하지 못했다. 아베 정권을 파헤친 영화 ‘신문기자’보다도 홍보가 안됐다. 유명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반지하방의 가족’이라는 캐리커처를 그렸지만 그냥 묻혔다. 영화평론가 마치야마 도모히로는 자신의 트위터에 “일본 공중파 방송이 칸 그랑프리 작품을 이렇게까지 냉대하는 것은 처음 봤다”라며 “일본의 민영방송국들이 기생충 홍보 프로모션을 진행하기 힘든 분위기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썼다.
일본에서 ‘기생충’은 한국영화 좋아하는 이들 몇몇이 찾아본 뒤엔 자연스럽게 사라지겠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뚜껑을 열어보니 기적이 일어났다. 개봉 뒤 한 달도 채 안된 2월 5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일본에서 한국영화가 100만을 넘은 것은 정우성ㆍ손예진 주연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후 15년만이다.
그 때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 당시만 해도 한류 붐이 일본 열도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배용준 장동건 이병헌 정우성 등 이른바 ‘한류 4천왕’만 출연하면 무조건 흥행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에선 흥행에 실패했다던 허진호 감독의 ‘외출’만 해도 주연배우가 배용준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에선 270만 관객을 동원했다.
지금은 그 때와 정반대 상황이다. 일본 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않았고, 공중파 방송 등을 통한 홍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본 영화 추월 당했다” 자괴감도
‘기생충’의 인기는 전적으로 입소문에 의한 흥행이었다. 흥행 추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지난달 10일 105개관에서 개봉되어 랭킹 4위로 시작했던 ‘기생충’은 일주일 뒤인 17일에는 좌석점유율이 전주 대비 106%나 올랐다. 만 2주가 지난달 25일에는 주간 랭킹이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무엇보다 상영관이 134관에서 217관으로 늘어났고 이 추세가 이어져 지난 5일 100만 고지를 넘어선 것이다. 거기다 오스카 작품상으로 선정되자 예매 랭킹에서 전날 대비 201%가 뛰어오르더니 다시 랭킹 2위 자리를 차지했다.
일본 최대 영화 리뷰 사이트인 ‘필름마크스(Filmmarks)’에는 무려 5만6,000건의 리뷰가 올라와 있고, 평점은 5점 만점에 4.2점을 기록하고 있다. ‘기생충’과 같은 날 개봉한, 거의 몇 주 동안 어느 채널을 틀어도 나왔을 정도로 전폭적인 광고홍보 프로모션을 진행했던 ‘카이지–파이널 게임’에 달린 리뷰는 고작 7,000여개 뿐이고 평점은 3.1점에 그친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최근까지 304개관을 점령하고 영화 1위를 질주한 ‘오타쿠에게 사랑은 어려워’ 또한 리뷰는 1,100개, 평점 3.1점에 불과하다. 아카데미에 약한(?) 일본이니 앞으로 리뷰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러다가 전무후무한 10만 리뷰 대기록을 세울 지도 모른다.
리뷰 내용도 극찬에 가깝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놀랍고 경이로웠다는 평이다. 개중에는 “한국영화는 이미 일본영화가 아무리 따라가도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가 버렸다”는 자괴감 섞인 글도 상당수 있다. 애초부터 영화에 관심이 없는 나라였다면 모르겠지만, 일본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의 나라 아닌가.
포털사이트 야후재팬의 코멘트란, 2채널의 한국관련 게시판을 살펴봐도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이 두 곳은 한국에 관련된 뉴스라면 근거 없는 비난과 욕설이 반드시 등장하곤 하는 곳이다. 그런데 ‘기생충’에 대해서는, 이번 아카데미상 수상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혐한을 거론했다간 다른 유저들에게 넷우익으로 찍히는 분위기이다.
◇“빈부격차 내 얘기 같아” 공감의 힘
그날 저녁 아내와 ‘기생충’을 두고 얘기를 나눴다. 아내는 당연히 이 영화를 봤고 ‘친절한 금자씨’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한 영화라고 했다. 이번 오스카 수상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왜 오스카 4개 부문을 휩쓸었고, 또 일본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지 알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어로 전개되는 한국 이야기이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 이야기가 아니잖아. 일본도 미국도, 아니 이 영화에게 상을 준 다른 나라들 관객들도 다들 조금씩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거지. 사실 일본 관객들이 가장 공감할지도 몰라. 게다가 일본은 꽤 오랫동안 바뀌지 않고 있으니까. 아무튼 나는 왜 많이들 보는지 알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이런 뉘앙스의 일본 관객 리뷰가 많긴 했다. 영화 자체에 대한 극찬 사이로 “서늘한 내 인생을 보는 것 같다” “뭔지 모르겠지만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살인을 한다면 아마 저런 상황이겠지” 같은 말들을 남겼다. ‘기생충’이 한국에 처음 개봉했을 때 밀물처럼 쏟아졌던 ‘반지하방에 대한 추억’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할까.
그 추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일 수 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누군가에게 ‘기생충’이 묘사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니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모쪼록 다들 힘내시길.
박철현 작가
박철현 작가는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저널리스트를 비롯해 게임플래너, 술집 주인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다 현재는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네 명의 아이를 뒀다. 일본 생활 이야기를 담은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어른은 어떻게 돼’ ‘이렇게 살아도 돼’ 같은 에세이를 냈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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