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접기에 뜨개질까지…영화 탄생 숨은 주인공, ‘스카이피자’ 엄항기씨
영화 ‘기생충’ 촬영지로 유명해진 서울 노량진동 ‘스카이피자’를 운영하는 엄항기(65)씨는 2018년 봄에 들어온 촬영 제안을 처음엔 거절하려 했다. 엄씨의 남편이 “가게 어수선해지고 귀찮다”며 촬영을 반대했다고 한다. 엄씨 부부의 마음을 돌린 건 노르웨이 사위였다. 최근 가게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엄씨는 “딸이 노르웨이 사람이랑 결혼해 거기(노르웨이)에서 사는데 사위가 ‘괴물’(2006)을 봤다며 촬영을 적극 추천했다”고 웃었다. 봉준호 감독의 팬인 외국인이 ‘기생충’의 탄생에 일조한 셈이다.
이 가게는 ‘기생충’에서 ‘피자시대’로 나온다. 극중 충숙(장혜진)이 생계를 위해 피자 포장 박스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로, 연교(조여정)네 집에서 집사인 주연(이정은)을 몰아내기 위해 두 자식과 공모를 벌이던 장소였다. 스카이피자는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면서 해외 영화팬들에게 새삼 주목받고 있다. 가게 방명록엔 ‘잇 필스 소 서리얼(It Feels so surrealㆍ너무 비현실적이란 뜻) 등의 영어와 일본어로 적힌 방문 소감이 여럿 적혀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여파로 잔뜩 움츠러든 국내 관광과 달리 ‘기생충’의 여운을 좀 더 적극적으로 즐기려는 해외 영화팬들의 ‘촬영지 성지 순례’였다.
엄씨는 ‘기생충’의 숨은 주인공이다. 극중 기택(송강호) 가족에게 피자 박스 접는 법도 직접 가르쳐줬다. 엄씨는 “배우들이 박스 접는 걸 너무 헤매서 가르쳐줬다”며 “그렇게 잘 접지는 못하더라”고 농담했다. 봉준호 감독은 엄씨 가게에서 손뜨개질로 만든 수세미를 보고 ‘기생충’에 충숙이 뜨개질을 하는 장면을 새로 넣었다. 엄씨는 “봉 감독이 ‘이게 뭔가요?’라고 물으며 관심을 보이더니 결국 촬영을 하더라”며 “장혜진씨가 마침 뜨개질을 한다고 해 난 실만 줬다”고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엄씨에게 ‘기생충’ 촬영은 영화 같은 일이었다. 엄씨는 “봉 감독이 촬영 때 너무 더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촬영하던 모습이 생각난다”며 “반나절 촬영 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 겸손하다 생각했는데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차지하는 걸 보니 뭉클했다”고 자식 일처럼 기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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