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지붕은 주택에 사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주택에서 지붕은 단지 비바람 막아주는 기능을 넘어선다. 지난해 12월 말 세종시 다정동 한 택지 지구에 들어선 이동우(41)ㆍ한레지나(38)씨 부부의 ‘물결지붕 집(연면적 199.5㎡)’. 지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한 집이다.
부부는 윗집을 지붕 삼는 아파트에서 줄곧 살아왔다. 직장 때문에 세종으로 옮기면서 은퇴 후로 미뤄 뒀던, ‘세 아이(10세ㆍ7세ㆍ4세)와 함께하는 우리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물결 지붕과 비정형 고창
아직 개발 중이라 황량한 택지에 먼저 들어선 이 집은 먼발치에서부터 시선을 끈다. 단단한 회색 타일 본체 위에 얹힌 짙은 회색의 지붕이 물결치듯 일렁인다. 동쪽에서 보면 경사진 지붕이 물결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서쪽에서 보면 두 개의 시옷(ㅅ)자 지붕이 나란하다. 종이를 접듯이 여러 번 접힌 지붕이다. 천경환 건축가(깊은풍경 건축사사무소 소장)는 “똑같은 경사 지붕을 서로 맞댄 박공 지붕의 지루함에서 벗어나 네모 반듯한 본체 위에 상반되는 지붕을 올려 재미있고 풍성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뾰족하게 치솟아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박공 지붕에 비해 여러 번 접힌 물결 지붕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천 소장은 앞서 2018년 ‘나비지붕 집’을 통해 지붕 접기를 처음 시도했었다. 부부는 나비지붕 집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천장이 시원하게 높은 집을 원했는데, 나비지붕 집은 천장이 높고, 튀지 않으면서 무척 새로운 공간처럼 느껴져서 좋았어요.”
지붕 아래도 물결이 일렁인다. 지붕의 아랫면이자 2층 천장은 지붕 모양을 그대로 따른다. 새하얗게 칠해진 내부 천장면에는 실링팬을 제외한 아무런 장식이나 조명이 없다. 2층 천장 높이는 위치에 따라 3~4m로 요동친다. 멀미가 날 법도 한데, 흰색으로 통일하고 밑에서 쏘아 올린 간접조명 덕에 정돈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천장 공간을 풍성하게 하는 건 비정형의 고창(高窓)이다. 지붕과 본체의 벽 사이 생긴 틈에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사다리꼴 등 크고 작은 유리창을 넣었다. 지붕 아래 고창은 사생활을 노출할 걱정 없이 빛과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인다. 천 소장은 “고창은 집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지만 하늘을 볼 수 있게 하고, 집 내부에서는 문을 닫아도 빛과 소리를 통해 인기척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고창 외에 일반적 눈높이의 창은 크기를 최소화했다. 창이 클수록 사생활을 보호하려고 커튼으로 가리기에 급급하다는 것이 천 소장의 설명이다.
고창은 예상치 못한 풍경도 담는다. 부부는 “밤에 아이들을 재우려고 함께 누웠는데 아이가 ‘아빠도 달한테 인사해 봐, 나는 매일 달과 인사하고 잠들어’라며 고창 밖 달을 가리켰다”라며 “그 순간 ‘아 집을 짓기를 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천 소장은 “빛이 내리쬐고, 하늘이 그대로 드러나는 천창이 다소 일방적이라면 지붕 아래 고창은 아련하고 비스듬하고, 편안하게 내ㆍ외부를 연결시켜 주는 장점이 있다”며 “다섯 식구가 하나의 지붕을 공유하면서 지붕이 모든 식구를 감싸 안아주는 느낌을 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가족 5명을 위한 대형 옷방, 키다리 책장, 노천탕…
지붕 아래에서 부부가 꿈꿨던 삶이 펼쳐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세 아이를 씻기고 옷 갈아입히느라 힘들었던 부부는 건축가에게 가사노동 부담을 덜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 옷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걸 종류별로 세탁기에 넣고, 다시 개어서 각자의 옷장에 넣어야 하는 중노동에서 해방되고 싶었다”고 부부는 입을 모았다. 건축가는 1층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 다용도실, 샤워실, 화장실이 딸린 대형 옷 방을 만들었다. 다섯 식구가 집에 들어와 씻고, 옷 갈아입고, 세탁기에 넣는 전 과정이 한 공간에서 한번에 이뤄진다.
거실 주방 가족실이 일체형인 1층은 밋밋하지 않다. 2층으로 가는 수직 공간이 포인트다. 현관에서 옷방으로 이어지는 1층 복도와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만나는 수직 공간은 천장 높이가 8m에 달한다. 층계를 따라 촘촘하게 들어선 책장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부부는 “사다리가 필요할 정도로 높은 책장도 우리가 원하는 집의 풍경이었다”고 했다.
책장 위로 방과 연결된 작은 뻐꾸기창 덕분에 1층 복도가 마치 유럽의 작은 골목길 같이 연출된다. 층계가 끝나는 1층 계단참은 긴 벤치처럼 이용된다. 계단 앞 큰 테이블에 가족들이 모여 얘기하고, 책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가족들의 목소리와 눈빛과 웃음이다.
계단 아래 작은 창고는 별책부록 같은 공간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두라고 만들었는데, 단열재를 깔고 조명을 달면서 마치 다락방처럼 아늑한 공간이 됐다. 부부는 “한 명이 들어가 푹 자기도 좋고, 아이들과 사이 좋게 게임을 하기도 하는 만능 공간으로 쓴다”며 “짐만 둘 것 같아서 다락을 두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 계단 아래에 다락방이 생겼다”고 했다.
대중목욕탕처럼 작은 탕이 있고, 그 옆 선반에 의자를 두고 씻을 수 있도록 해 둔 2층 욕실도 부부가 꿈꿨던 공간이다. 유리문을 열면 발코니의 편백나무 노천탕으로 연결된다. 부부는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대중목욕탕에 즐겁게 다녔던 기억이 있다”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 아이들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집은 경제 가치로만 평가된다. ‘그 돈으로 아파트를 샀으면 집값이 훨씬 올랐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동반되고, ‘창이 많아 여름엔 덥다’ ‘천장이 높아 난방비가 많이 든다’ ‘간접조명은 어둡다’ 등의 생활밀착형 조언도 잇따른다. 부부는 삶의 가치를 얘기했다. “교통과 난방, 집값 등 경제적 효율을 따지면 아파트가 정답이죠. 어떤 공간에 사느냐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과 땅 파고, 나무 심고, 삽질하고, 고기 구워먹고, 달 보고, 햇빛 쬐면서 생각합니다. ‘오늘은 또 뭘 해 볼까’ ‘저기에 뭘 둘까’ 하고요. 아파트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어요. 삶이 풍성해졌어요.”
세종=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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