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로깨나 드나들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연극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에 관한 ‘전설급 입소문’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고, 트리플 캐스팅(박은석ㆍ강영석ㆍ이상이)을 완주해야만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으며,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다가 콘서트로 끝난다는, 올 겨울 최고 화제작이다. 덕분에 초연임에도 대학로에선 쉽지 않은 연장 공연까지 성사됐다.
배우 박은석(36)은 입소문의 진원지다. 원래도 ‘대학로 아이돌’로 불리는 인기 배우이지만, 이번 작품으로 팬덤이 더 불어났다. ‘티켓 대란’도 예사였다. 23일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최근 마주한 박은석은 “군대에서 긴 행군을 마친 듯이 어느 때보다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박은석이 연기하는 주인공 케이시는 허름한 클럽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모방 쇼를 하며 살아가는 남자다. 집세도 못 내는 형편인데 아내가 임신을 하자 케이시는 생계를 위해 조지아 맥브라이드라는 이름의 드래그퀸이 되어 무대에 선다. “처음엔 이 작품이 왜 나에게 왔을까 의아했어요. 춤과 노래엔 영 소질이 없거든요. 그럼에도 선택한 걸 보면 저 자신을 깨부술 수 있는 색다른 자극과 도전에 목말랐던 것 같아요.”
배우들은 무대에서 바로 바로 옷을 갈아 입으며 드래그퀸으로 변신한다. 극중 대사처럼 “여자보다 더 예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뮤지컬 ‘헤드윅’ 못지않게 화려한 드래그쇼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순한 흉내내기나 볼거리에 그쳤다면, 감동까지 주긴 어려웠을 것이다. 박은석은 “작품에 담긴 태도와 진정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며 “그만큼 연습량도 많아서 대학로에 소문날 정도였다”고 말했다.
스타킹을 신다가 민망한 부위가 찢어지거나 가발이 벗겨지는 돌발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현장성이야말로 연극의 묘미다. 박은석은 순발력과 재치로 해프닝마저 극의 일부로 흡수한다. 그의 공연은 원래보다 15~20분가량 길기로 유명하다. 그는 “왜 길어지는지는 나도 미스터리”라면서 “디테일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채워 넣어야 직성이 풀리긴 한다”고 웃었다.
그의 애드리브는 기교가 아닌, 완벽주의의 산물이다. 대사의 행간과 호흡, 리듬까지 분석한 그의 연기는 “세밀하면서 풍성하다”는 평을 받는다. “배우의 역할은 주어진 시간 내에 관객을 최대한 설득해 내는 거예요. 그래서 밀도가 중요해요. 무대가 묽지 않고 걸쭉해야 관객들이 배부르게 돌아갈 수 있잖아요.”
극의 메시지는 제법 묵직하다. ‘남성성의 상징’ 프레슬리를 동경했던 케이시는 오히려 짙은 화장과 드레스, 하이힐을 통해 자유로워지고 진실한 자신을 발견한다. 케이시가 처음으로 립싱크가 아닌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는 노래는 “주저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라”며 관객을 따뜻하게 격려한다.
이런 케이시는 박은석과 어딘가 닮았다. 박은석도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쥐고 흔들어도 끝끝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는 스물두 살 때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한국에 왔다. 뒤늦게 서울예대에 들어갔고, 자원입대해 군복무도 마쳤다. 군 생활 2년 동안 날마다 신문 사설을 읽으면서 한국어 발음을 교정했다. 대학로 연극에 뛰어든 건, 스물아홉 살 때였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일이 없었어요. 당시 살았던 할머니댁이 대학로 인근이었어요. 저기라도 가 봐야겠다 싶어서 오디션에 지원했어요.”
연극 ‘옥탑방 고양이’로 데뷔해 ‘트루 웨스트’ ‘햄릿’ ‘클로저’ ‘올모스트 메인’ ‘히스토리 보이즈’ ‘카포네 트릴로지’ ‘엘리펀트 송’ ‘어나더 컨트리’까지 숱한 무대에 올랐다. TV 드라마에도 종종 얼굴을 비쳤다. SBS ‘닥터 프리즈너’와 MBC ‘검법남녀’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tvN ‘보이스2’ 등에서 개성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연극배우”라고 힘주어 말한다. “신기하게도 한 작품씩 끝날 때마다 어딘가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그런 보람 때문에 무대를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다음달엔 연극 ‘아트’(3월 7일~5월 17일ㆍ백암아트홀)를 시작한다. 미술품을 두고 부딪히는 세 친구를 그리면서 인간 내면의 허영과 오만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 극이다. 그동안 진중한 역할을 해 왔던 그가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과 ‘아트’까지 연달아 코미디에 나온다고 하니, 팬들도 신이 났다. ‘아트’에선 배역이 40대인데 지난해 ‘어나더 컨트리’에선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었다. 배우는 때때로 시간여행자가 된다. 박은석은 “이제 성숙미가 나올 때도 됐다”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휴먼드라마” 같은 인생을 꿈꾼다. 그 안에는 희극과 비극이 모두 있다. 인생이 연기에 녹아 들어야 관객도 위안을 얻을 거라 믿는다. “시스템에 갇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그럴 뻔했던 사람이고요. 한 번뿐인 삶이잖아요. 진정한 자신을 찾고 있는 누군가에게 제 연기와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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