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각본집 온라인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각본에는 영화에 미처 담기지 못한 장면들이 있다. 극중 기택과 충숙의 애정 신, 기정이 동네마트에서 몰래 물건을 훔치는 장면, 민혁과 기우가 술을 마시며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이다. 반대로 각본에는 없지만 영화에만 있는 장면이나 대사도 있다.
영화에는 각본이, 드라마에는 대본이 있다. 뛰어난 영상작품의 근간이 되는 글이지만, 연극의 바탕인 희곡이 문학의 하위 장르로 나름의 작가적 영역을 구축해온 것과 달리 각본ㆍ대본은 철저히 영상을 보조하는 서브텍스트로만 여겨져 왔다. 영상의 그늘 뒤에 가려 ‘숨겨진 글’로 살아왔던 각본이 최근 들어 ‘각본집’ ‘대본집’ 열풍과 함께 어엿한 단독 주인공으로 나서고 있다.
이 같은 열풍을 이끌고 있는 것은 단연 ‘기생충’이다. 봉 감독이 직접 그리고 쓴 ‘기생충 각본집&스토리북 세트’는 3만7,000원이라는 다소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알라딘, 예스24 등 온라인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서점가 최고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책을 낸 플레인아카이브에 따르면 기생충 각본집은 아카데미상 수상 직후 전날 대비 26배가 판매됐다. 지난해 9월 출간된 책은 아카데미 시상식 전까지 누적 판매량이 1만권 정도에 불과했으나 아카데미 수상 이후 판매량이 껑충 뛰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이신화 작가 대본집 역시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예스24 집계에 따르면 2월 둘째 주 소설ㆍ시ㆍ희곡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는 기생충 각본집이, 7위와 9위에는 스토브리그 대본집 1,2권이 각각 올라 있다.
이런 ‘각본집’ 열풍을 거슬러 올라가면 2016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있다. 당시 이 영화를 두고 열성적 팬덤이 형성되며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각본집을 출간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박 감독 사진집을 출간한 적 있는 출판사 ‘그책’이 아가씨 각본집을 출간, 지난해 12월 기준 16쇄를 찍으며 각본집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책 출판사 관계자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등 일부 수요에 따른 각본집 시장이 형성돼 있긴 했지만 일반인들에게 각본집이 그만큼 주목을 받은 것은 ‘아가씨’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아가씨’ 사례에서 보듯 각본집 출간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흥행보다는 공고한 팬덤이다.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즐기고, 다각적으로 소비하고 싶어하는 팬들이 지갑을 열기 때문이다. 100만명의 대중 관객보다는 10만명의 열성팬이 좌우하는 시장이다.
여기에 ‘리커버’ ‘한정판’ 등 책을 소장할 만한 수집품으로 여기는 정서가 더해지며 각본집 시장은 점차 커지는 모양새다. 수요가 급증하자 대형 출판사도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김영사는 최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미디어콘텐츠 부서를 새로 만들었다. 지난해 김은희 작가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각본집과 ‘스토브리그’ 대본집을 출간한 것도 김영사다. ‘스토브리그’ 대본집 출간의 경우 김영사 대표가 직접 진두지휘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교양이나 지식을 위해 책을 읽었다면 최근에는 책을 일종의 ‘굿즈’처럼 소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이러한 출판계 흐름에 따라 자연히 각본집과 대본집에 대한 수요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곁가지로 출간되는 책이긴 하지만, 엄연히 단행본인만큼 기존 교양서를 만들 때처럼 ‘읽는 즐거움’도 고려한다. 지난해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 각본집을 출가한 아르테 인문교양팀의 김지은 편집자는 “단순히 영화에 딸린 무언가가 아니라 책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 정치 사회 인문 분야의 키워드를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벌새 각본집에는 김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비롯해 ‘벡델테스트’로 잘 알려진 미국의 그래픽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과 김보라 감독의 대담,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등 다양한 필자의 비평도 함께 실려 한 달 만에 3쇄를 인쇄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