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56> 인생샷 찍으려다 코끼리밥 될 뻔
가까이, 더 가까이 외친 여행객들, 초베강 3m 거리의 악어 갑자기 ‘심드렁’
사파리 외국인 “묵고 죽자”…알고보니 7년 근무 울산 현대중공업 ‘건배사’
“안냐세요”(안녕하세요) “방가방가”(반갑습니다)
짐바브웨에서 보츠와나로 넘어가는 국경의 단층짜리 출입국관리사무소. 현지 직원이 서툴지만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로 인사한다. 국경을 통과할 때는 죄진 것도 없는데 언제나 ‘을’ 신세기 때문에 직원의 환영사가 더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양인만 눈에 띄면 “니 하오”를 남발한 아프리카에서 우리말 인사는 더욱 반가웠다.
보츠와나에서 차량을 갈아타고 초베강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강변 로지(호텔) 겸 여행사에서 소형 보트를 갈아타고 상류쪽으로 바람을 갈랐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에서 동물은 볼 만큼 봤다며 얼룩말 정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로 간이 커진 때였다.
하지만 악어를 3m 거리 안에서 볼 때는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세렝게티에서 50m 거리의 악어를 보려고 망원경 들고 용을 썼던 기억이 새로운데 초베강에서는 강변에 휴식하는 악어, 물 속으로 잠수하는 악어, 먹이다툼하는 악어 온갖 악어들이 넘쳐났다.
“가까이, 더 가까이”를 외쳤던 여행객들도 2m 길이의 악어 사정권 안에 들어서자 침묵 모드로 돌변했다. 악어는 심드렁했다. 옆에서 떠들든 말든 눈조차 뜨지 않았다.
강 한가운데는 악어의 먹이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다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린 악어의 입에는 커다란 고기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커다란 조약돌을 닮은 하마의 등판 너머 강변 초원에는 가젤과 물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보트는 다시 상류로 내달렸다. 강변에 검은 점들이 멀리서 포착됐다. 점들이 점점 커지더니 육중한 덩치에 길다란 코가 보였다. 초베국립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끼리가 서식한다더니 200~300마리의 코끼리가 물놀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벌써 보트 여러 대가 엔진을 끄고 코끼리 무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코끼리는 소리에 민감한 탓이다. 어미 다리 사이에서 물장구를 치는 새끼코끼리는 귀여웠고, 코를 감고 싸우는 수컷 코끼리는 위협적이었다.
보트가 코끼리 무리와 4~5m 거리가 됐을 때였다. 모두 카메라를 꺼내 코끼리도 찍고, 셀카도 찍고 있었다. 일행 한 명이 코끼리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뱃머리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수컷 코끼리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길다란 코를 들어올렸다. 웅성거리는 소음에 성질이 났던게다. 사진이고 뭐고 일단 손을 잡아 보트 뒷편으로 이동했고, 후진기어 넣은 보트는 전속력으로 강 중간으로 대피했다.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사진 한 장 건지려다 외신에 실릴 뻔 했다.
보트가 출발했던 호텔 수영장 야외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판에 적힌 닭고기, 양고기, 소고기 정도는 읽을 수 있었는데 ‘croc’라고 적힌 음식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격도 가장 비쌌다. Crocodile, 악어 고기였다. 중국 둔황 명사산 일대에서 낙타발을 먹은 후 가장 큰 도전이었다.
주문은 했지만 덜컥 의심이 들었다. 악어사냥은 금지일텐데, 혹시 밀렵인가. 그것도 메뉴판에 버젓이 이름까지 올려놓은 걸 보면 경찰이 뒤를 봐주나. 혼자 의혹을 키우고 있는 사이 누가 묻는다. “악어 잡아도 됩니까”
합법적인 유통과정을 거쳐 넘어온 악어고기란다. 우리도 밍크고래 포획이 불법이지만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 중 보호종이 아닌 녀석에 대해서는 해경이 유통증명서를 발급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맨 정신에 그냥 먹기는 부담이 되서 잠베지 맥주 한 병을 곁들였다. 바게트빵에 샌드위치처럼 안에 들어간 악어 고기를 씹는 동안 미각이 곤두섰다. 햄버거 먹는 일행이 맛을 묻는다. “악어에서 돼지 삼겹살이나 목살 맛이 납니다.”
보츠와나의 오후는 초베사파리였다. 그런데 주차장에는 세렝게티에서 탔던 형태의 지프차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뚜껑을 떼내 전 좌석이 오픈된 지프차에 ‘오비’라는 젊은 친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프차는 초베강을 따라난 흙길을 달렸다. 임팔라 코끼리를 봐도 모두 무정차 통과했다. 그래도 사자는 대접을 해줘야 했다. 늙고 이빨 빠진 숫사자가 나무 그늘에서 눈감고 입을 벌린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태양이 그 녀석한테도 뜨거웠나보다.
우리 바로 옆에는 백인 여행객 혼자 모는 지프차가 있었다. 가이드나 운전기사도 없었다. “사자가 어슬렁거리는데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차 안에 있는데”라며 활짝 웃는다. 그러면서 “한국인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40대의 이 백인이 “안녕하세요”라며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를 건넨다. 울산과 경남 거제의 현대중공업에서 7년 근무했다고 했다. 보츠와나에서 김치찌개와 불고기 잘 먹는다는 외국인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좋은 여행하라”며 떠나는 지프차 뒤로 이 여행객이 큰소리를 지른다. 우리말 같은데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천천히 되짚어보니 이랬다. “묵고(먹고) 죽자” 현대중공업 회식자리가 낳은 건배사가 아프리카 한가운데서 한국인의 배꼽을 잡게 할 줄은 몰랐다. 팔을 크게 흔들어줬다.
흙길 옆에 불에 탄 동물 하나가 있었다. 몸통 구조를 보니 코끼리였다.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태운다고 했다.
오비는 3년차 가이드였다. 권투선수하면 딱 맞게 생겼다. 전통 배를 만들다 가이드로 전업했는데 적성에 맞단다. 사파리 최장 투어로 22일 밤낮을 뛰었다고 했다. 보통 사파리에서는 밤이면 인간의 이동이 금지되는데, 이 친구는 적외선 안경을 끼고 맹수가 우글대는 사파리를 누볐다며 우쭐댄다. 이 정도면 목에 힘들어가도 된다. 대단하다 오비!
글ㆍ사진 전준호 기자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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