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회장, 청ㆍ재계 코로나19 간담회서
기업 회식하게 주 52시간 족쇄 풀라 건의
문 대통령 ‘서생의 정의’에 뼈아픈 일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3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 저녁 회식을 주52시간 족쇄에서 풀어달라’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건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자 문 대통령은 지난 13일 이 부회장 외에, 최태원 SK 회장과 구광모 LG 회장 등 ‘5대 그룹’ 오너와 최고경영자급들을 급히 대한상의로 불렀다.

이날 문 대통령의 핵심 메시지는 기업들이 올해 설비투자 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해 달라는 당부였다. 코로나19가 투자계획의 돌발변수로 부상하고 글로벌 교역 위축으로 수출이 더욱 암울해진 상황에서 기업들이 설비투자마저 지난해(-8.1%)처럼 주저하면 경제활력 회복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으로선 ‘눈도장’이라도 찍어 두려는 심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출 기준 연간 GDP의 50% 가까이를 차지하는 민간소비의 활성화가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간담회에서 그 얘기가 빠졌을 리 없다. 고사 직전인 주변 음식점들을 살리기 위해 지자체나 공공기관들이 구내식당을 닫고 직원들을 주변 상가로 내보내는 전례 없는 상황이 거론됐을 법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SK 최 회장은 계열사 구내식당의 휴무 동참을, 이 부회장은 저녁 회식 활성화를 위해 회식이 주 52시간과 관련해 근무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정부의 유권해석을 요구한 셈이다.

대통령은 건의가 흡족했던 모양이다. 청와대는 곧바로 “대통령이 재계 건의를 전폭 수용했다”고 설명했고,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즉각 “저녁회식은 주 52시간에 전혀 저촉되지 않으니 마음껏 회식을 하라”는 입장까지 냈다. 하지만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비상한 각오로 논의한 내수 활성화 방안의 가장 두드러진 내용 중 하나가 정부에 기업의 저녁회식을 허락해 달라는 건의였다는 현실은 난감하다. SNS에는 “할 얘기가 고작 저녁회식 얘기밖에 없었냐”는 비아냥이 난무했다.

하지만 나는 이 건에 관한 한 문 대통령이 이 부회장의 건의를 경제 실정(失政)에 대한 뼈아픈 일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회장의 건의엔 ‘지금 내수 경제를 이 지경까지 망가뜨린 건 결코 코로나19만이 아니다. 글로벌 경기부진이나 미중 무역전쟁 탓만도 아니고, 주 52시간 강행 같은 경제 실정의 책임이 크다’는 취지의 항변이 담겨 있다고 본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은 서생(書生)적 문제 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통찰을 남겼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정치와 정책은 근년 들어 현실감각은 실종되고 오직 ‘서생의 정의’만 판치는 무대로 변질돼 왔다. 서생의 정의는 현실의 복잡성에 대한 감각 없이 당연한 가치만 고수하려는 정의를 말한다. 당위에 기대기 때문에 비판과 반대는 즉각 불의(不義)로 치부된다. 그래서 치열한 현실의식으로 거기에 맞설 용기가 없는 한 그것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현 정부 들어 강행된 최저임금 과속인상이나, 주 52시간제, 주휴수당 등도 하나하나 짚어보면 모두 당연하고 옳은 정책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소득격차 해소는 절박했고, 근로자의 여가 확보도 장기적으로는 소비를 촉진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의 과속이 문제였고, 그 결과 전체 근로소득은 줄고,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을 생사를 가르는 경영난 속으로 몰고 가는 상황을 빚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취임 후 처음으로 ‘비상경제 시국’을 선언하고 ‘특단의 대책’을 예고했다. 또다시 추경이 추진되고, 내수 진작을 위한 소비쿠폰과 영세 자영업자 등에 대한 직간접 상가임대료 지원안까지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과감한 재정정책이 절실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생의 정의에 휘둘려 가랑비에 옷 젖듯 야금야금 내수기반을 훼손해 온 실책에 대한 냉정한 반성 없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식 효과 밖에는 낼 수 없다. 코로나19 위기가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에 마음을 열고, 상인적 현실감을 회복할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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