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코로나19 사태, 손 놓은 일본
“정말 잘 뛰었어. 진짜 멋있었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격려를 했다. 하지만 자기 차례가 끝난 큰 아이 미우는 내 쪽을 잠깐 쳐다본 후 다시 얼굴을 푹 숙였다. 평소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지난 2월2일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일대에서 제11회 도쿄 중학생 역전 마라톤 대회가 ‘예정대로’ 열렸고, 미우는 당연히 고가네이시 대표로 출전했다. 이 대회는 도쿄 도내의 지자체 49개(중심부 23개구, 타마지역 26개시) 지역 중학교 2학년들이 남녀별로 팀을 이뤄 다른 지역과 대결하는 릴레이 마라톤 경기이다.
한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위험성이 제기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취소되지 않을까 했는데, 무사히 개최됐다. 하긴 이 때만 해도 확진자가 3명에 불과했고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가 요코하마에 입항하기 전이었다. 아내는 “사람은 확실히 적게 오지 않을까?”라 했지만, 웬걸 각 지역의 학부모들과 응원하는 사람들로 도로 주변이 가득 찼다.
코로나19의 위력적인 전염성을 모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 역시 지난 21일이나 돼서야 대규모 이벤트 자제를 공식 발표했으니 어찌 보면 취소한다는 게 이상하다. 만약 취소했다면 이 대회를 위해 세 달이나 연습했던 아이들의 불만과 실망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사쿠사 공사현장으로 출근했다. 지난 주부터 유난히 한적해진 거리다. 전날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주변과 정반대다. 지난달 27일부터 시작된 중국정부의 단체여행 출국금지 조처로 인한 직접적 타격이 느껴진다. 하루 종일 중국인들로 바글거리던 거리가 단 일주일 만에 황폐해졌다.
하지만 일본정부나 언론은 코로나19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막 개원한 통상국회 질의 생방송을 틀어놓고 며칠 동안 봤는데, 코로나19 이야기가 나온 건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문제에 대한 몇 분이 전부였다. 줄곧 아베 신조 총리의 스캔들을 둘러싼 공방뿐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은 코로나보다 ‘사쿠라 스캔들’ 관심
일종의 평행세계를 보는 기분이랄까. 방송이 끝나고 다시 10년만에 처음 보는, 휑한 아사쿠사 거리를 보면 분명 코로나19가 일본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TV에선 말이 없다. 여당이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야당은 왜 질문을 안할까. ‘사쿠라 스캔들’이 큰 문제이긴 하지만, 야당 의원들이라도 정부의 방역대책, 진단키트 확보 등을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13일까지 그러하지 않았다. 언론도 문제의식이 없었다. 크루즈선에서 확진자가 속출하던 시기였다.
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언론이 일본의 방역미숙을 지적하고 유튜브를 통한 크루즈 선내 상황이 폭로되면서 몇몇 감염자들이 감염 사실조차 모르고 일상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 14일부터 분위기는 바뀌었다. 지난 17일에는 외부 전문가가 포함된 방역대책본부가 차려졌다.
하지만 최초의 확진자가 나온 지 한 달이나 넘어 역학조사는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후생노동성은 개인정보보호법을 근거로 지금도 감염자 동선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 와카야마현과 홋카이도의 감염자 동선은 지자체의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본정부는 개인정보보호법을 들이밀지만 사실상 역학조사가 불가능해졌음을 실토한 것이 아닐까 한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일본의 방역대책
한달 동안 손을 놨으니 추적이 될 리가 없다 보니 자체적으로 동선 파악을 시도하던 언론들도 지난 14일 이후에는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이 발생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단키트도 부족해 전수조사는 아예 불가능하다.
아베 총리는 그제야 회견을 열고 “18일부터 하루 1,000명씩 진단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지만, 지금도 하루 최대 300명이 진단 최대치이면 1일 평균 15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난 21일 기준 크루즈선을 제외하면 1,522명 정도가 유전자 증폭 검사인 PCR 검사를 받았다. 한국에서 하루 5,000건 이상의 검사가 이뤄지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이제 ‘죽음의 배’가 되어버린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식 매뉴얼주의’의 실수였다. 응급상황에 대처할 역량이 안되면 아예 기항시키지 말아야 했다. 본토가 뚫린 상황에서 배를 받아놓고, 진단키트도 없는 상태에서 미즈기와(水際ㆍ섬나라의 특성을 살린 일본의 전통적인 방역대책으로 아예 상륙을 시키지 않는 전략) 대책을 시행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이런 총체적 난국을 지켜 보며 아내와, 아이들과 숱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22일 내 생일 때도 그랬다. 먼저 내가 아베 총리 등 현 집권세력의 허술한 방역대책에 대해 비판했다. 아베 총리를 싫어하는 아내는 일단 맞장구는 쳐주면서도, 이견을 제시한다.
“그런데 한국처럼 조금만 의심가도 다 (검사)하겠다는 건 너무 힘든 거 아냐? 모든 국민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맞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지금은 약 자체가 없으니까 결국 자기 면역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면 개인위생 철저히 하고 밥도 잘 먹고 운동도 하고 그래야지. 치사율도 그렇게 높은 게 아니잖아. 난 코로나19가 그렇게 무섭다는 느낌은 안 들어.”
“코로나19보다 일본정부의 방역대책이 엉망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거야.”
“아니 누가 그걸 몰라?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욕 한다고 금세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알아서 하는 거지.”
“촛불이라도 들어. 그리고 선거 좀 잘하란 소리야.”
“지금까지 항상 민주당 찍었고 이번 참의원 선거 땐 ‘레이와신센구미(야마모토 다로가 이끄는 진보야당)’ 찍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꼭 너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이 “둘 다 그만하고 빨리 놀러 가자. 아빠 생일이잖아!”라고 말했다. 아이들 외출 준비 중에 스마트폰으로 도요게이자이(東洋經濟)의 뉴스가 도착했다. 대강 훑어보니 코로나19 때문에 올해 일본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1964년처럼 이번에도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의 부흥과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아베 정권의 기대를, 코로나19가 부숴 놓은 셈이다.
“아빠! 빨리 가자! 스마트폰 좀 그만 봐!”
현관 입구에서 마스크를 하지 않은 아이들이 나를 부른다. 마스크가 동이 나 안 쓴지 닷새나 됐다. 고가네이의 대형쇼핑몰은 아사쿠사와 달리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절반은 되어 보인다. 아이들은 내 선물을 사준다면서 자기네 장난감과 필기도구를 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다.
◇경제 타격 우려, 의도적 방치 의심
그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다. 한국처럼 방역을 철저하게 하고 모든 동선을 밝혀 버리면, 또 한국언론처럼 미디어가 ‘공포’를 확산시키면 경제활동 자체가 엉망이 될 수도 있겠구나.
안 그래도 일본은 지난해 10월 소비세(부가가치세)를 올리는 바람에 2019년 사사분기가 마이너스 성장율을 기록한 바 있다. 거기다 코로나19 대책까지 철저히 해버리면, 개인 위생이 철저하기로 이름난 일본인이라도 외출 등을 삼가할 수 밖에 없다.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자연스레 소비가 줄고, 결과적으로 경제에 타격을 준다. 어차피 방역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아예 국민에게 맡기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괜한 공포감보다 경제를 살리는 방향으로, 즉 전략적으로 ‘각자도생’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판단은 독자들 몫이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자체보다, 그로 인한 경제불황 때문에 사업이나 가게가 망해 희생당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방역에 나선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일본정부는 이것을 어긴 셈인데, 역설적으로 그러했기 때문에 길거리에 활기가 도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정말 아베 총리는 (나는 아니라고 보지만) 이미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일까.
박철현 작가
박철현 작가는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저널리스트를 비롯해 게임플래너, 술집 주인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다 현재는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네 명의 아이를 뒀다. 일본 생활 이야기를 담은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어른은 어떻게 돼’ ‘이렇게 살아도 돼’ 같은 에세이를 냈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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