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수용ㆍ노동착취… 선감학원 원아대장 전수 분석 보고서
문서엔 ‘무단이탈’ 적혔으나… 동료는 “탈출하다 숨져 묻어줬다”
1956~82년 선감학원에서 퇴원한 원생 4,691명의 원아대장 전체 모습. 이곳에 수용된 소년들의 인적 사항, 입원 경로, 입원 후 동태 등이 기록돼 있다. 김정우 기자

“명령 복종토록” “한 팔로도 일을 잘함” “의복이 남루하고 신체가 단정치 못해 걸인으로 오인 수용” “정신력이 모자람”….

1942년 일제강점기 때 설립돼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가 인수, 1982년까지 운영했던 부랑아 수용시설 ‘선감학원’의 원생 개개인에 대한 당시 기록물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 선감학원은 이곳에 입소했다가 퇴원한 원아들의 인적 사항과 가정 환경, 입원 경로, 입원 후 동태 등을 ‘원아대장’이라는 이름의 문서에 꼼꼼히 기재했다. 이른바 ‘소년판 삼청교육대’로 불릴 만큼 인권침해가 심각했던 선감학원의 구체적 운영 실태가 피해 당사자 실명과 함께 등장하는 1차 자료는 현 시점에선 이 원아대장(총 4,691건)이 유일무이하다.

물론 작성 주체가 가해자인 선감학원이었다는 점에서, 원아대장만으로 당시 그곳에서 벌어졌던 참상의 전모를 파악하는 건 힘들다. 직접적인 인권유린 행위는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은 데다, 원생 사망 사건 등을 축소ㆍ은폐한 정황마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 매우 강압적이었던 시설 내 분위기와 아동 노동 착취, 마구잡이 강제 수용, 인권 경시 풍조 등을 확인하는 데엔 충분하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일보는 지난해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기도로부터 제출받은 원아대장 4,691건 전체 내용을 4ㆍ9통일평화재단이 정밀 분석한 보고서를 최근 단독으로 입수했다. 여기엔 원아대장 전수 분석 결과와 함께 주요 기록 내용이 담겨 있다. 피해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례가 드문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임에도 선감학원 원아대장의 존재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건 불과 2년여 전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에야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이 뒤늦게 공론화된 탓이 크다. 선감학원 폐쇄 이후에도 30여년간 숨죽이며 살았던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이 잇따르자 경기도는 2016년 2월 ‘경기도 선감학원 사건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는 등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2017년 7월 꾸려진 ‘선감학원 사건 희생자 유해발굴 사전조사 계획수립 용역’ 조사단의 활동 과정에서 1956~82년(퇴원 연도 기준) 원아대장 4,691건이 경기도기록관에 49개철로 구분된 채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선감학원에 끌려갔는지 낱낱이 기록된 문헌이 비로소 발견됐다는 얘기다.

1970년 무렵 선감학원 원생들이 강당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모여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군대식의 엄격한 규율로 원생들을 통제했음을 보여 주는 기록 사진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경찰의 무차별 강제수집, 전체 원생의 29%”

선감학원 원아대장은 이곳이 국가폭력의 현장이자 사실상 강제수용소였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원아대장 전수 분석 결과 보고서에는 ‘입원 전 생활’이 분류돼 있다. ‘거리에서 생활’과 관련한 내용이 2,571건(54.8%)으로 가장 많았고 ‘다른 시설에서 전원’(1,511건ㆍ32.2%) ‘가정’(380건ㆍ8.1%) 등이 뒤를 이었다. 선감학원 운영의 표면적 이유가 ‘부랑아 교화’였다는 걸 감안하면 여기까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각 사례별로 구체적 입원 경로를 살펴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의에 반해, 심지어 ‘부랑아’라고 볼 이유가 없는데도 수용된 원생들이 상당수였다. 예컨대 1957년 원아대장에 등장하는 한 소년은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며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약을 사러 가다가 수집 중에 있는 경찰에 걸려” 입소했다. “빵집에서 빵을 먹고 있던 중 수집”(57년 원아대장) “순경이 부모 계시냐고 물어 안 계시다고 하니까 그대로 수집”(63년) “매형 댁에 왔다가 수원시청을 구경하는데 시 직원이 수집”(67년) 등의 경우도 있었다. ‘껌장사’나 ‘구두닦이’를 하다가 끌려가는 일도 흔했다. 원아 대장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수집’과 ‘단속’, ‘검거’, ‘연행’이었고, 그 주체는 경찰이나 관공서 직원이었다. 보고서는 “관경합동단속반 등 경찰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입원한 원생이 1,351명으로, 전체의 28.8%”라고 적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가족 없이 홀로 지내던 중 입소한 비율이 22.2%(1,041명)에 그쳤다는 점이다. 부모와 함께 살던 원생은 1,314명(28.0%), 한부모 가정이었던 원아는 1,520명(32.4%)에 달했다. 조부모나 형제, 이모, 숙부 등 다른 가족이 있었던 원생도 816명(17.3%)으로 집계됐다. “나는 가족이 있다”고 통사정을 해도 국가의 ‘수집’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무원들이 무차별적인 강제수용에 나선 이유는 ‘단속 실적 쌓기’를 위해서였다. 1957년 2월 제정된 경기도 선감학원 조례는 수용자 연령을 ‘13세 이상 18세 미만’으로 정했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입소 당시 연령대는 △8~13세 1,940명 △14~16세 1,584명 △17~19세 834명 △20세 이상 244명 △7세 이하 52명 △미상 37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셈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1962년 한 원아대장에는 “(22세 때) 통금 위반에 걸려 병역관계가 분명치 않아 나이를 속여 입원하게 됐다”고 기재돼 있다. 순경이 수가 모자란다고 하여 수집해 수용시킨 사례(60년 원아대장)도 등장한다. 부랑아를 보호가 아니라 ‘청소’의 대상으로 여기고, 법률적 근거도 없이 국가가 강제 수집에 나선 결과였다.

선감학원 원아대장 주요 분석 결과. 그래픽=김대훈 기자
◇군대식 규율로 통제, 아동 노동 착취

선감학원 원아대장에 피해 생존자들이 몸서리치며 한목소리로 말하는 구타와 고문, 성폭행 등이 담겨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곳이 군대식의 엄격한 규율이 작동하며, 강제 노역이 행해지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은 적지 않다. 국가가 어린이나 청소년을 상대로 노동 착취를 일삼았던 공간이라는 뜻이다.

신○○(1932년생)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945년 7월 입원한 신군의 원아대장 중 ‘원아에 대한 주의사항’ 항목에는 “명령 복종토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운영 주체인 경기도가 수용된 소년들을 보호나 교육보다는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입증하는 단적인 근거다. 당초 ‘소년병 양성’을 위해 선감학원을 만들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가 거의 그대로 잔존했던 셈이다.

집단 생활에 어느 정도의 규율은 필요하다는 걸 감안해도, 마치 군대를 연상케 하는 훈육 목표가 설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선감학원에서 일상화된 강제 노동에서 찾을 수 있다. 선감학원 원생들은 토지 개간과 농사, 염전, 축산, 양잠 등 성인한테도 버거운 노동의 현장으로 끊임없이 내몰렸다. ‘일하라’는 명령에 대한 반발심을 없애도록 ‘순응의 내면화’를 꾀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하는 데 쓸모 없는 소년’은 가차없이 퇴출됐다. 1963년 9월 3일 입소한 최□□(42년생)군에 대해 원아대장은 “오른손 불구임과 동시에 간질병이 있다고 함. 속히 퇴원 조치”라고 적었는데, 그는 이틀 만에 퇴소했다. 66년 9월 27일 들어온 정△△(54년생)군도 “머리가 바보에 가까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사흘 뒤 선감학원을 벗어났다. 반면 57년 6월 입원한 이◇◇(44년생)군은 왼쪽 팔이 절단된 상태였는데도 “정직하고 한 팔로도 일을 잘한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았고,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피해 생존자들도 강제 노역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다. 1966년 10월쯤 선감학원에 입소했다는 국모(59)씨는 2017년 10월 경기도 용역 관련 조사단과의 면담에서 이같이 말했다. “(선감학원에서) 공부는 형식적이고, 거의 강제 노역이지요. 그런데 이때까지 그 많은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고 했는데, 우리한테 이만큼도 준 거 없고, 노임을 준 것도 없고, 나온 물건을 우리에게 먹여 준 적도 없고, 그걸 다 어떻게 했냐 말이지요.” 10대 소년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 내고는 그 결과물은 학원, 다시 말해 국가가 고스란히 챙겼다는 의미다. 국씨는 이어 “내 품을 못 하면(할당량을 못 채우면) 저녁에 기합 받고 얻어맞았다”며 “무릎 같은 데 상처 많은 사람들은 다 조인트 맞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원생들은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렸다. 당시 원생들의 식사는 꽁보리밥이나 강냉이밥, 그리고 소금ㆍ간장ㆍ새우젓 가운데 하나의 반찬이 전부였다고 한다. “호박, 양배추 등을 훔쳐다가 요리해 먹는 걸 발견해 주의를 줌” “쌀을 훔쳐먹다 발각” “뱀을 잡아 구워먹겠다고 하다가 물려서 입원” 등의 원아대장 내용들은 배고픔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쓰레기통에서 아무거나 주서(주워) 먹기를 잘하는 고로 위장병 입원”(1961년 원아대장) 같은 사례도 있었다.

지난 17일 찾은 경기 안산시 선감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1964년 10월 26일자 선감학원 관련 신문기사. ‘자유에의 탈출’ ‘공명에 놀아난 단속’ 등의 제목과 함께 당시 국가의 무차별적인 강제수용 정책, 원생들의 탈출 시도 등을 전하고 있다. 안산=김정우 기자
◇목숨 건 탈출, 바다에 빠져 죽기도

비참한 수용 생활은 ‘목숨을 건 탈출’로 이어졌다. 각 원아대장 뒷면 ‘입원 후 동태조사표’를 보면, 수없이 많은 원생들한테서 ‘무단 이탈(또는 도주)’과 ‘검거’, ‘신병 인도 재수용’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경우인데, 그 대가는 가혹한 구타였다. 국씨는 “(내 경우엔) 몇 번 탈출을 시도했다가 (성공하지) 못 했다.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다 잡혀 와서 맞는 거 보고 (그 다음엔) 탈출할 생각을 못 했다”고 했다.

선감학원 탈출이 힘들었던 건 이곳이 고립된 섬(선감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급류와 갯벌 탓에 바다를 건너는 게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오후 6시 간조시간에 도강하여 대부방면으로 가다가 무리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다시 본원으로 돌아왔음”(1960년 원아대장) “바다를 건너 엇섬으로 도망가다 자진 귀원”(77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나룻배를 얻어 탔다가 수배에 나선 학원 측에 붙잡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재수용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탈출 시도는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원아대장에도 기록돼 있다. “해수로관 튀어 들어가서 행방불명, 사흘 후 시체로 발견돼 인양”(1963년) “2차 무단이탈 본도서 북방 약 1,500m 지점에서 익사체로 발견”(66년) “무단이탈 시도, 행방불명, 사흘 뒤 선감 약 300m서 시체 인양”(67년) 등이 그런 경우다. 심지어 77년엔 16세 소년이 이틀간 세 차례나 도주를 시도한 끝에 차디찬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난해 7월 한국일보 영상 콘텐츠 제작소 ‘프란(Pran)’이 선감학원 사건 피해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제작ㆍ공개했던 동영상 ‘섬으로 납치된 소년들의 이야기 Ep.2’. 이 영상에 등장하는 피해자 중 한 명인 이대준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부회장은 지난달 1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피해 생존자들도 2017년 10~11월 조사단 면담에서 관련 증언을 쏟아냈다. “물론 여기 있으면서 맞아 죽은 사람도 있지만, 도망가다 죽은 사람이 80~90%예요”(이모씨, 1966~74년 수용) “그 사람은 수영을 치고 도망갔다가 2주 만에 떠밀려 왔는데, 누구인지 분간을 못 해요. 퉁퉁 불어 터서. 고기가 안 뜯어 먹은 것만도 다행이었어요”(강모씨, 56~62년 수용). 원아대장 4,691건 가운데 사망 사실이 기재된 원생은 총 25명이었는데, 이 중 ‘익사’ 처리는 9명이었다. 탈출 후 뒷동산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사례도 있었다.

◇기록상 ‘사망’은 25명… “훨씬 더 많을 것”

하지만 원아대장에 기재된 사망 인원을 실제 희생자 수로 보긴 어렵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예컨대 1968년 7월 입소한 여명구(59년생)군의 경우, 72년 5월 ‘무단이탈’이라는 사유로 제적 처리됐다. 그러나 최소 3명의 생존자들은 그가 탈출 시도 후 숨졌다고 기억했고, 한 명은 “내가 직접 매장했다”고까지 증언했다. “여명구는 내 동기인데, 도망간 건 그때 알았죠. 한 열흘 만에 시체가 떠밀려 왔다고 들었어요”(이모씨, 66~74년 수용) “여명구라고, 걔도 고래당(선감도 해안가) 앞에 내가 손으로 묻었어요”(김모씨, 62~82년 수용).

게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원아대장 내의 ‘모순’도 있다. “1967년 6월 26일 행방불명”이라고 기재된 김◎◎(51년생)군의 퇴원 사유는 ‘7월 5일 귀가’라고 돼 있다. 다른 사례들에서처럼 ‘신병 확보’나 ‘검거’ 등의 표현은 전혀 없이, 자취를 감춘 지 9일 만에 난데없이 귀가 처리된 셈이다. 또 “69년 6월 22일 무단이탈 실종, 6월 24일 익사 사망 내용 통신 연락”이라고 적힌 이☆☆(56년생)군에 대한 최종 기록도 ‘69년 7월 31일 실종’이었다. 선감학원 측이 원생 사망 사건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축소 또는 은폐하려 했을 가능성을 의심해 볼 만한 대목이다.

1968년 7월 30일 선감학원에 입소한 여명구(당시 9세)군의 원아대장. 단속된 장소 및 경위, 입원 경로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얼굴 사진도 실려 있다. 뒷면 ‘입원 후 동태조사표’에는 ‘72년 5월 31일 무단이탈’ 퇴원으로 적혀 있으나, 복수의 피해 생존자들은 “그 시기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숨진 친구”라고 증언했다. 김정우 기자

실제로 선감학원은 원생이 사망하면, 법적 절차도 준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0~11월 조사단 면담에 응한 8명의 피해 생존자 가운데 7명은 “의사와 경찰이 입회해 사망 확인, 변사 처리를 한 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목사와 담당 선생들이 입회를 하는 경우만 있었다고 했다. 숨진 원아들의 시신은 선감학원 인근 공동묘지에 묘비 하나 없이 매장됐다. 원아대장상 사망자 25명 가운데 13명에 대해선 사망 원인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입소한 지 75일 만에 세상을 떠난 최연소 사망자(6세)도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설명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상 선감학원 사건 희생자는 원아대장으로 나타난 ‘사망자 25명’이 전부가 아닐 공산이 크다. 원아대장 4,691건 가운데, 퇴원사유가 ‘무단이탈’ ‘도망’ ‘도주’ ‘실종’ ‘탈출’ ‘행방불명’ 등으로 적힌 865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원아대장 전수 분석을 맡았던 홍수정 4ㆍ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은 “피해자들의 증언, 불명확한 퇴원 사유 등을 볼 때 실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았을 수 있다”며 “먼저 원아대장을 토대로 당시 원생들의 생존 여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이 대부분 고령이라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선 하루빨리 국가가 전면적인 조사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원아대장 4,691건을 입수한 권미혁 의원은 “선감학원 원아대장은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에 신뢰성을 더해 줬다”며 “인권 유린의 실상을 밝히는 것은 물론, 피해자가 명예를 회복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권 의원은 이어 “국회가 현재 어려운 상황이지만 2월 임시국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되도록 발로 뛰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4ㆍ9재단의 홍 실장도 “원아대장이라는 실증적 자료를 통해 구체적인 국가 폭력 사례가 확인된 만큼, 향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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