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끝나지 않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영화 ‘기생충’으로 지난달 10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한 봉준호 감독. 사상 처음으로 ‘비(非)영어권 영화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라는 역사를 만든 주인공은 사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 중 한 명이었다. 2017년 외신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블랙리스트 사태 경험을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그는 “한국 예술가들이 받은 충격이 크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봉 감독의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국일보가 지난달부터 만나온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안”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라는 얘기였다.
특히 지난 1월 30일 대법원 판결은 문화예술계를 들끓게 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일부 혐의를 무죄 취지로 판단,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가 “책임자 처벌과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 등 재발 방지를 위한 후속 조치의 조속한 이행이 없다면 블랙리스트 사태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이유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지배 세력이 공권력을 오ㆍ남용해 문화예술계 영역에서 위헌적 범죄를 저지른 다양한 사건들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시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규모는 중복 집계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총 9,273건(단체 342곳, 개인 8,931명)에 달한다. 이들은 야당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정부 정책을 비판했거나, 해고 노동자 투쟁 지지 등 사회 연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공모사업 배제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어디까지 왔나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추였던 진상조사부터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2017년 7월 출범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의 조사 기간은 고작 11개월에 불과했다. 강제력이 있는 수사권도 갖지 못했다. 태생적 한계 탓에 조사 결과도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조사위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이양구 연출가는 “활동 기간이 짧아 사실을 확인하고도 조사하지 못한 사례가 상당수 있는 데다, 수사권한이 없어 문화체육관광부와 공공기관들의 자발적인 서류 제출, 관계자 진술에만 의존해야 했다”고 전했다.
게다가 진상조사위의 권고마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예컨대 문체부에 대해 진상조사위는 44명의 징계 대상자 명단을 올렸으나, 이 가운데 실제 징계로 이어진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감사원 감사로 징계받은 3명 제외). 33명이 주의조치만 받았을 뿐이다. 심지어 중징계 대상에 오른 오모 서기관조차 법률상 징계에 속하지 않는 불문경고를 받는 데 그쳤다.
블랙리스트 실행에 적극 가담한 혐의가 드러나 수사의뢰 대상이 된 10명도 아직까지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작성ㆍ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에 대한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검찰 관계자는 “이미 기소된 상급자들의 직권남용죄 성립 범위나 관련 법리를 반영해 수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피해자들 “재발방지 대책 이행 시급”
특히 피해자들에게 블랙리스트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김진이(32)씨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후속조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이었던 김씨는 2015년 12월 회사를 떠났다. 조직에서 벌어진 블랙리스트 사건을 외부에 알렸다가 부당 전보조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한 달 전만 해도 공연 기획이 그의 업무였는데, 갑자기 무대 감독ㆍ음향 감독 등 기술직 직원들이 있는 무대예술부로 발령 났다. “전문성 없는 사람이 그 부서에 가진 않거든요. ‘나가라’는 뜻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당시 김씨는 ‘팝업씨어터(카페, 공원 등 기존 공연장이 아닌 장소에서 이뤄지는 깜짝 공연)’에 참여하는 작품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팝업씨어터 참가작인 연극 ‘이 아이’와 관련해 문제가 불거졌다. 2015년 10월 17일 첫 공연을 본 간부진이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가 주검이 된 채 돌아왔다는 내용 △입고 있던 점퍼의 브랜드가 ‘노스페이스’였던 점 등을 들어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며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곧바로 공연 취소 지시가 내려졌다. 도저히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던 김씨가 이를 거부하자 간부진은 남은 공연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담당 부장은 김씨에게 “위원장이 방향을 정했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공연을 적극적으로 방해해야 추후 문제가 발생해도 변명거리가 있고, 직원들도 보호할 수 있다는 논리도 댔다. 하지만 김씨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위에서) 시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수동적 존재로 인식해 버리면 (블랙리스트 사태 같은)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잖아요.”
문화예술계의 끈질긴 요구로 지난해 7월 예술위는 피해자 의견이 반영된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씨는 “신입사원들이 늘어남에 따라 예술위 내에서 벌어졌던 블랙리스트 문제를 모르는 이들도 많아졌다”며 “재발 방지를 위해선 ‘기억의 사업’이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김씨는 또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더라도 자신처럼 퇴사하는 직원이 나오지 않도록 내부고발자 보호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피해 당사자인 오성화(47) 서울프린지네트워크(프린지) 대표는 “가해자의 직접 사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문체부 또는 산하기관 차원에서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한 포괄적 사과를 내놓긴 했으나, 정작 진짜 가해자는 빠져 있었다. ‘반쪽짜리 사과’라는 지적이 일었던 이유다. “재발 방지를 위해 대리 사과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가해자가 인간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오 대표는 ‘독립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를 기획하는 곳’(프린지)에서 일하다가 2015년 블랙리스트의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그는 문체부 산하 예술위가 주관하는 ‘2015년도 다원예술 창작지원 공모사업’에 지원서를 냈다가 돌연 탈락했다. 사업 성과를 인정받아 2004년부터 11년 연속 매년 5,000만원씩의 창작지원금을 받아 왔던 터라 매우 당혹스러웠다. 심사결과를 발표하던 방식까지 갑자기 비공개로 전환돼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추후 밝혀진 전말은 이렇다. 청와대는 문체부를 상대로 2014년 2월 프린지가 ‘2014년도 상반기 문예진흥기금 지원대상’에 선정된 것을 문제 삼았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단체’라는 이유였다. 내부 문건에는 오 대표가 용산참사 해결 촉구 및 철도파업 지지 시국선언에 참여한 부분이 지적돼 있기도 했다. 청와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문체부는 대책을 모색했고, 결국 2015년 1월 기금 공모사업에 지원한 프린지를 탈락시키기로 했다. 예술위는 문체부의 이런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애초부터 ‘타당성 없는 무리한 배제’였음을 알려 주는 대목은 문체부가 청와대에 보고한 문건에도 잘 나타나 있다. ‘행사 자체는 내용, 인지도, 파급 효과 측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 ‘지원 중단 시 젊은 예술가들의 반발 및 부작용 예상’ 등의 문구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군부 독재시절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국가가 손과 발을 묶고 존재 자체를 지우려 한 거잖아요.” 오 대표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공포감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2015~2016년 연거푸 정부 지원에서 탈락하며 쌓이기 시작한 1억원의 빚도 꾸역꾸역 갚아나가는 중이다. 그는 “2016년엔 프린지가 지원할 수 있는 다원예술 항목이 아예 사라졌다”며 “2017년부터 다른 항목으로 지원해 3,000만원을 받는 이상한 구조가 돼버렸다”고 설명했다.
오 대표는 최근에서야 프린지 문제의 공론화에 나섰다. 지난달 17일 ‘프린지 블랙리스트를 말하다’라는 토론회를 열고, 국가가 자신들에게 자행한 폭력을 상세히 고발했다. 블랙리스트 피해를 겪은 지 5년 만에 당사자로서 직접 발언하고 나선 것이다.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는 문제인데도, 블랙리스트 사태가 ‘지원 사업에서 배제된 특정 사람들만의 이야기’로 인식되고 있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술위 같은 기관들의 자율성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게 오 대표의 생각이다. 문체부 지시를 받아 사업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고유한 설립 목적에 따라 예술가와 함께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문체부는 예술위를 민간자율기관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트라우마 여전한데 이어지는 2차 가해들
피해자들이 블랙리스트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문화예술계는 지난 1월 말 또 한번 충격에 빠졌다. 김기춘 전 실장의 직권남용 혐의 상당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일부 혐의는 사실상 무죄 취지로 판단한 대법원 판결 때문이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의 행위 가운데 ‘각종 공모 신청자 명단을 보내게 하고 공모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한 부분’에 대해선 “(원심의 유죄 판결은) 직권남용 법리를 오해했고, 필요한 심리도 다하지 않았다”고 봤다.
블랙리스트 피해자 측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소송대리인단을 이끌고 있는 강신하 변호사는 “특정 예술인 지원 배제 목적으로, 예술인 명단을 상부에 보내고 심의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행위는 헌법상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국가적 범죄행위”라고 지적했다. 강 변호사는 “그런 행위가 직권남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유태인 학살명단 작성 행위도 범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블랙리스트 실행자들의 최근 거침없는 행보도 피해자들에겐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 지난해 8월 송수근 전 문체부 1차관이 계원예대 총장으로 부임한 게 대표적 사례다. 송 총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관리하는 태스크포스(TF)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송기영 계원예대 총학생회장은 “교수님들 중에는 블랙리스트 사태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분들도 있는데, 블랙리스트 실행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교육계로 돌아오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예술위의 한 간부가 최근 발간한 서적도 피해자들의 분노를 키웠다. 블랙리스트 실행자였던 그 간부는 책에 ‘산하기관 직원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나도 무지 괴로웠다’는 취지로 적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가해자가 피해자들 앞에서 자신도 피해자인 척하는 게 온당하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자동 폐기 위기 ‘예술인 권리보장법’
문제는 법적ㆍ제도적 보완책 마련 작업이 헛바퀴만 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블랙리스트 사태 재발 방지 등을 위해 제정된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은 20대 국회 임기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위기에 처해 있다. 국회의 무관심 탓이다.
해당 법안은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을 명시한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예술의 자유 침해 행위는 범법 행위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법안 제8조는 국가기관 및 예술지원기관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예술인이나 예술단체를 차별하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또 블랙리스트 작성이나 지시 행위, 이미 작성된 블랙리스트의 이용 행위 등을 금지하는 내용도 담겼다. 예술지원사업 담당자가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명문화한 것이다. 아울러 예술지원사업의 지원 대상 선정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공정한 심사를 방해하는 행위도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동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활동가는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에 대한 처벌 근거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런 법률이 생기면 민간인 신분으로 지원사업 심사위원을 하며 사실상의 검열행위를 할 경우, 공무원이 아니어도 형사처벌이 가능해진다”고 덧붙였다. 공무원에게만 적용 가능한 직권남용죄 이외에, 또 다른 사법처리 근거가 마련된다는 뜻이다.
여야 간 이견이 없는 법안이지만, 현재로선 20대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 여당은 ‘야당의 비협조로 법안소위가 열리지 않고 있다’며 야당 탓을 하고, 야당은 선거 국면 등 상황 핑계만 대고 있어서다.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신동근 의원 측 관계자는 “법안소위를 열어 비쟁점 법안만이라도 처리하자고 요청했으나, 법안소위 위원장인 박인숙 의원이 거부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인숙 미래통합당 의원실 관계자는 “의원들의 참석 여부를 확인했을 때 회의를 열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라고 해명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