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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Wide] VR로 죽은 가족과 만난다, 심리 치유일까 망자 비스니스일까

입력
2020.03.11 18:00
수정
2020.03.11 18:5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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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ep&Wide는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어린 나이에 혈액암으로 사망한 딸 '나연이'를 가상현실(VR)로 재현, 나연이를 그리워하는 부모와 만나도록 해준 MBC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한 장면. MBC ‘너를 만났다’ 영상 캡처
어린 나이에 혈액암으로 사망한 딸 '나연이'를 가상현실(VR)로 재현, 나연이를 그리워하는 부모와 만나도록 해준 MBC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한 장면. MBC ‘너를 만났다’ 영상 캡처

지난달 6일 MBC는 어린 나이에 혈액암으로 사망한 딸(나연이)을 가상현실(VR)로 재현, 나연이를 그리워하는 부모와 만나도록 해준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를 방송했다. 이 방송 이후 시청자들 사이에선 매우 큰 반향이 일었는데, ‘치유’라는 긍정적 효과에 주목한 의견도 있었지만, 또 다른 상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과연 ‘가슴에 묻은 딸’을 만나게 해준 VR 기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사별 시 3단계 애도반응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할 경우, 사람들의 정상적인 애도 반응은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속되며 크게 3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심리적 쇼크’ 상태로 현실을 부인하는 증상을 보이며 보통 수주간 지속된다. 두 번째는 망자에 ‘집착’하는 단계로 분노, 불면, 죄책감, 반복적인 꿈, 대인관계 기피 등 증상이 나타나며 수개월 동안 이어진다. 마지막은 ‘해소 및 재구성’ 단계로 정상적 일상 생활, 새로운 대인관계를 맺기 시작하는데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각 단계에 따라 다른 대응 전략이 필요한데 애도 반응 초기일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경청하며, 솔직한 감정 표현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 조절 및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면 소통을 늘리고, 새로운 관계 형성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수년 이상 애도 반응이 계속되거나 우울증으로 진행되는 경우 반드시 전문가 상담과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

 딸과의 재회와 힐링 

방송에서 나연이 엄마는 VR속 캐릭터를 ‘나연이’라고 인식하고 몰입하며, 평소 그리웠던 감정들을 마음껏 표현한다. 나연이와 헤어진 지 수년이 흘렀기 때문에, 정상적 애도 반응은 벗어난 상태다. 그렇다면 수년이 지난 지금 시점이 아니라, 애도 반응 초기 단계에서 이러한 VR 체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VR영상이 분노, 불면, 죄책감 등의 애도 반응을 더욱 가중시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상처’가 아닌 심리적 힐링에 도움을 주는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면서 좀 더 심리 치유가 됐을 것이다. 프로그램 제목은 ‘너를 만났다’이지만 엄마에게는 ‘너를 통해 나를 만났다’가 더욱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엄마의 내면 정화를 VR 재회가 도와준 것이다. 따라서 향후 엄마에겐 VR 재회에 대한 집착 같은 부작용보다는, 이번 이벤트가 딸과의 행복한 기억으로 각인될 것이다. 결국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가 같은 전문가 그룹의 상담 결과에 따라 애도 반응에 대한 대응 전략이 수립되고, 종합적인 심리 치유 프로그램 속에서 적절한 콘텐츠가 제공된다면, VR 체험은 정서 조절과 심리적 힐링을 돕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윤리성 문제는 없나 

일부 네티즌이 제기한 ‘망자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의 윤리적 문제나, VR콘텐츠가 오히려 망자에 대한 집착이나 또 다른 상처를 유발한다는 지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필자는 ‘망자 비즈니스’ 관점 아닌 가족 즉 ‘생존자를 위한 심리적 힐링’의 관점에서 VR콘텐츠가 기획 및 개발이 된다면 윤리적 문제나 우려하는 부작용은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단순히 망자와의 재회에 초점을 둔 이벤트적인 체험이라면 ‘망자 비즈니스’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존자의 심리적 상태를 전문가 상담을 통해 올바르게 판단한 뒤 적절한 VR 콘텐츠를 제공한다면 분명 ‘생존자를 위한 심리적 힐링’이 될 것이다. 애도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우울증, 중독, 심지어는 자살과 같은 극단적 행동도 발생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VR 콘텐츠 제공은 오히려 이를 예방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비싼 개발 비용으로 인해 일반인이나 저소득 계층은 혜택 받지 못할 것이라는 기회 불평등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가상현실’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에는 ‘3I’, 즉 Immersion(몰입감), Interaction(상호작용), Imagination(상상 혹은 연상)이 있다. 보통 게임용 VR 개발은 몰입감을 극대화 하기 위해 최고 사양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상 정신 의료분야의 경우 게임처럼 많은 비용을 투자하지 않더라도 환자의 연상 및 상상 활동을 증가시킬 수 있는 기법들이 많다. MBC VR 콘텐츠에서는 모션 캡쳐와 인공지능(AI) 음성 인식 기술 등 최첨단 기술로 약 8개월 동안 15명의 개발자들이 힘든 작업을 진행했음에도, 엄마는 직접 VR 체험 동안 나연이와 다른 점을 금방 찾아냈다. 부모이기 때문에 행동상의 디테일을 찾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나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애착 인형‘이 있었다고 가정할 경우, 애착 인형을 360도 실사 촬영을 하여 VR 체험을 했다면 적은 비용으로도 엄마 마음 속 나연이를 떠올리는 데 충분하지 않았을까?

정신과학에서는 이러한 연상 소재를 ‘단서(cue)’라고 한다. 특정 인물이나 행동에 학습된 단서에 대한 정보만 적절히 제공된다면 충분히 특정 상황을 연상시킬 수 있다. 따라서 특정 단서만 노출되는 단순화 전략으로 VR을 기획한다면 적은 비용으로도 충분히 VR 콘텐츠 개발이 가능하다. 결국 기회 평등의 우려는 콘텐츠 기획 전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상현실(VR)을 활용한 치료는 심리 치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상현실(VR)을 활용한 치료는 심리 치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

 어떻게 발전해야 하나 

정신 질환을 위한 가상현실 치료의 경우, 3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치료 효과도 충분히 입증됐다. 특히 가장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분야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앨버트 리쪼(Albert Rizzo) 박사에 의해 개발된 ‘버츄얼 이라크’는 극심한 불안이나 악몽, 불면 등을 겪고 있는 이라크 참전 병사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반복적인 전쟁 상황 노출을 통해 대부분 환자들에게서 PTSD증상이 상당 부분 호전되는 효과를 거뒀다. 또 2016년 영국 UCL대학교가 개발한 우울증 치료 가상현실 프로그램은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대화로 위로하여 울음을 그치도록 유도하는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대부분 자기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는데 여러 차례 대화를 통해 아이의 울음을 그치는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자기 연민의 정이 증가함을 입증하였다. 즉 가상현실 콘텐츠는 다양한 이유로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증상을 완화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입증된 셈이다.

VR 힐링 프로그램이 향후 긍정적 진화를 거듭하려면 몇 가지 점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상용화를 위해선 앞서 언급한 대로 단순화된 VR콘텐츠 기획을 통해 최대한 개발 비용을 줄여야 한다. 둘째, 정신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VR 힐링 솔루션 형태로 개발돼야 한다. 이 경우 다양한 심리 치료 기법 등이 활용될 수 있는데 감정 조절을 위해 릴랙스 훈련, 감정 표현이나 자기 주장 훈련을 위한 역할극, 과거의 좋은 기억을 떠올려 긍정적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회상 치료, 세상 밖으로 관심을 갖도록 돕는 사회 기술 훈련 등이 해당된다. 셋째는 최근 들어 반려 동물 가구가 급증하면서 반려동물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상실감과 우울증상을 겪는 이른바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을 앓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 이와 관련된 VR 콘텐츠 개발도 매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임종을 앞둔 환자를 대상으로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장소나 사람들과의 이벤트 등에 관한 ‘버킷리스트’를 가상현실로 구현하여 생전에 큰 선물로 제공한다면 잊지 못할 감동을 주는 따뜻한 VR 콘텐츠가 될 것이다.

VR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과거로 갈수 있고, 미래로 갈수도 있으며, 죽은 사람과 재회도 가능해졌다. 사람의 감정은 가상 현실 속에서 쉽게 속는다. 따뜻한 VR콘텐츠를 자주 접하면 우리 마음도 따뜻해지고 어느덧 개인의 상처는 점차 치유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MBC VR다큐멘터리 ‘너를 보았다’는 디지털 휴먼 콘텐츠의 가능성 및 디지털 사회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향후 타 방송사나 정신건강 관련 기관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이어받아 인간을 향한 VR 힐링 프로그램 개발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이상훈 은혜병원 진료원장


이상훈 원장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자 VR 치료전문가다. VR 전문개발업체인 ㈜팀제파의 개발이사를 맡고 있으며 법무부 산하 전국 11개 보호 관찰소에서 시행하고 있는 VR 알코올중독자 치료 프로그램의 총괄 기획을 담당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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