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바래버린 공책 속 연필로 꾹꾹 눌러 담은 한 줄의 문장들. 81년 전 폴란드의 여덟 살 소년은 하루에 한 문장씩 일기를 썼다. 2학년으로 올라가는 조건이자, 글쓰기 연습을 위한 여름 방학 숙제였다. 한 줄 한 줄은 숲을 거닐거나, 날아가는 풍선을 보거나, 딱따구리를 관찰하며 즐거워하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줄의 일기는 소년의 일상을 뒤흔든다. “1939.9.1.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기장을 메운 건 포탄 파편, 대포 소리였다. “1939. 9.13 배급표를 내면 빵을 나눠준다.” “1939.9.14. 바르샤바는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1939.9.15. 영국 비행기가 독일군에게 폭탄을 세 번 떨어뜨렸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래도 하루 한 줄씩 이어가던 일기는 1939년 9월 16일, 17일 이틀간 침묵한다. 18일부터는 날짜마저 사라진다. 일기장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은 일기장 안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일기장 주인공 미하우 스키빈스키는 90세로 살아 있다.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사계절 발행)는 스키빈스키의 80년 전 일기장을 그림으로 되살려냈다. 그날의 빛, 그림자, 날씨, 공기까지 붓 자국 하나하나에 깃들여 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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