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1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Pandemic, 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을 공식 선언했다. 그 여파로 국내를 비롯한 유럽, 미국 증시가 10% 가까이 급락하는 등 세계 경제가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보건기구가 어떤 곳이기에 사무총장의 말 한마디에 수백조원이 증발해 버린 것일까.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설립된 유엔(국제연합) 전문기구다. 전문기구는 유엔의 직속 산하 기관은 아니지만 사실상 유엔과 함께 움직이는 준독립기관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등이 우리에게 친숙한 전문기구들이다. 특히 세계보건기구는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 산하 보건기구와 국제공중위생사무소(OIHP)를 통합해 만들어졌기에 태생부터 유엔과 연관성이 깊다.
이 같은 배경 덕분에 유엔 회원국 대다수는 세계보건기구에 가입돼 있다. 회원국들은 매년 5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보건기구 본부에 모여 세계보건총회를 개최한다. 각국 대표들은 총회에서 지난해의 주요 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향후 활동방향에 대한 의제를 설정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예산 의결권도 총회에 있다. 총회에서 다룰 의제를 사전에 준비하고 이를 점검ㆍ추진하는 역할은 이사회가 맡는다. 이사회는 총회에서 선출된 34명의 이사로 구성되고, 이사의 임기는 3년이다. 세계보건기구의 실무는 사무국이 담당하는데 사무국의 수장이 바로 사무총장이다.
세계보건기구의 업무는 크게 △낙후된 지역에 약품ㆍ의료진 등을 직접 지원하는 현장 업무 △의료체계 구축을 돕거나 국제역학조사 등을 실시하기 위해 각국 정부간 협의를 이끌어내는 국제공조 업무 △질병 및 소재 등을 분류하는 기준 설정 업무로 묶을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이중 세 번째 업무인 ‘기준 설정’ 과정에서 다양한 논란을 빚어 왔다. 특정 질병이나 현상을 분류하는 기준을 제시했을 때 국가나 지역, 문화에 따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대표적으로 소시지, 햄과 같은 가공육을 1군 발암물질로 분류하거나 게임 중독을 공식 질병으로 분류한 사례가 있다.
발암 물질이나 질병을 분류한다고 해서 이를 강제로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이 세계보건기구에는 없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결정과 발표는 국제사회의 모든 분야에 변화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다. 특히, 부정적인 내용의 발표는 충격과 동요를 일으키다.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날짜와 상관 없이 진행 중인데도 유독 11일을 기해 세계 경제가 휘청거린 것도 세계보건기구의 ‘팬데믹 공식 선언’ 이 지닌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의 결정이 국가와 기업의 손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다 보니 세계보건기구는 오래 전부터 국제 정치의 싸움터로 변했다.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시급한 결정을 늦추거나 말을 바꾸는 일이 반복되면서 최근 몇 년간 국제 사회의 신뢰를 꾸준히 잃고 있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 역시 이번 코로나19 사태 대응을 두고 지나치게 중국의 눈치를 본다는 비판을 국제사회로부터 받았다. 강제력 없는 국제기구의 힘이 결국 신뢰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같은 행보는 세계보건기구의 근간을 흔드는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가 병마와의 최전선에서 의미 있는 역사를 만들어 온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인류 의료사에 길이 남을 천연두 퇴치는 세계보건기구 중심의 국제공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6대 사무총장을 지낸 고 이종욱 총장은 재임 중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비롯한 각종 질병 예방접종 보급에 매진해 ‘백신 황제(Vaccine Cza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지금 세계보건기구는 특정 국가, 지도자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제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잃어버린 신뢰와 존재감을 되찾을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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