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운영관리국장
“해방 후 정부의 주도적 노력으로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된 희생자 유해를 봉환하는 건 처음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지만 빨리 모시는 게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19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황동준(58) 운영관리국장은 자신을 “‘혼불에 끌리듯’ 이 일에 매달리게 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16일 재단국장으로 발령 받은 그의 직전 보직은 행정안전부 유해봉환과장. 2018년 12월부터 희생자 유해를 국내로 모시는 일을 맡아 왔다. 지금은 자리를 옮겨 대일항쟁기(1937~45)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업무를 맡게 된다. 자리는 옮겼지만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봉환이라는 업무는 계속 보고 있는 것이다.
새 자리에서의 포부를 물었지만 그가 먼저 털어놓은 건 아쉬움이었다. “유해 봉환과장일 때 봉환 업무를 마무리 지었어야 했는데, 두고두고 아쉬웠죠.”
그 미련 때문이었는지, 그는 지난해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국 전쟁포로ㆍ실종자 확인국(DPAA), 러시아, 일본, 중국 등지로 발에 불이 나도록 다녔다.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봉환을 위해 각국 담당자들을 설득하는 단내 나는 과정이었다. 분주히 뛰어다닌 결과 작년 10월 한국인 한 명의 신원을 최종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름은 최병연. 1918년생으로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숨겼다. 1943년 11월 타라와 전투에서였다. 중부 태평양에 위치한 소국 키리바시공화국. 하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수도인 타라와에서는 태평양 제해권을 두고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미군의 상륙전 감행에 ‘일본군’ 4,800명 대부분이 전사했다. 이 중 1,200명은 총알받이로 떠밀린 강제징용 한인들이었다.
당초 유해는 이달 말쯤 국내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키리바시공화국이 지난달 하순 우리나라를 입국금지 국가에 포함했다. “작은 원두막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의료시설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라 이해는 됐지만….” 황 국장의 얼굴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현재 유해 봉환은 5월 중순으로 잠정 연기된 상황이다. 이마저도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 탓에 확약할 수 없다.
지금까지 국내로 봉환된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유해는 약 1만2,000위. 하지만 이 유해들은 일본 정부가 자국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한국인 유해를 인도한 것이다.
최씨 유해 봉환에는 행운도 따랐다. 2018년 10월 미군 유해 5구를 발굴하던 DPAA 단원들이 2m 옆에서 아시아계 유해 1구를 발견했다. 황 국장은 “전사자 유해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 조국과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는 미국의 노력에 우리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며 “그때 DPAA가 최씨 유해를 일본에 인도했더라면 최씨 유해 국내 봉환은 영원히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은 유골을 발굴하면 화장 후 본국으로 옮겼다. 유골은 화장하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만큼, 이 같은 일본의 관행을 알고 있던 DPAA가 아시아계 유해를 따로 보관했던 것이다.
여기에 마침 지난해 8월 행안부 산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DPAA와 태평양전쟁 격전지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감식과 유해 국내 봉환에 협력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그 덕에 이름 없는 바구니에 담긴 최씨의 유해엔 ‘최병연’ 석 자가 달리게 된 것이다.
시기를 장담할 수 없지만, 최씨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면 후손의 요청에 따라 전남 영광군 선산에 안장될 예정이다. “나라가 힘이 없던 시절 남의 전쟁터에 끌려가 죽은 최씨 유해가 고국에 고이 눕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는 그는 “남은 공직 기간 다른 희생자 유해 봉환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하와이, 타라와 등지서 발굴된 아시아계 유해 150여구에서 한국인을 찾는 작업을 펼치고 있다.
배성재 기자 pass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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