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코로나19 의심 증상을 겪다
"마지막 모임이라 생각하면 되지.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매일 술을 마셨다. 첫 날은 도쿄에 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기자 친구들과 마셨고, 둘째 날은 오래된 동갑내기 친구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친한 선배님들과 낮부터 카운터 바를 빌려 마셨다. 카운터 바가 그날로 문을 닫았기 때문에 폐점파티도 겸한 자리였다.
술은 센 축에 속하지만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는 스타일이라 평소처럼, 아니 조금 더 적게 마셨다. 혹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는데 무슨 짓이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간 곳은 모두 도쿄의 한국가게들이었다. 손님들 발길이 끊어져 문 닫기 일보직전이라는데 돕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취지도 좋고, 간만에 마신 한국산 소주 맛도 좋았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갑작스러운 몸살, 지하철서 쏟아진 기침에 눈총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몸이 이상했다. 온 몸의 관절이 아팠고, 근육통도 찾아왔다. 목도 간질간질했다. 시국이 시국이니 체온부터 쟀다. 36.9도, 약간의 미열이다. 호흡곤란이나 두통은 없고, 목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인후염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몰라 러시아워 시간을 피해 전철을 탔다. 바깥과 온도 차가 심해서일까. 전철에선 더 심해졌다. 식은 땀이 흘러 내렸고, 기침이 나왔다. 처음 간헐적이더니 역을 지날수록 기침을 더 심하게 터져 나왔다. 당연히 주위 사람들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내 눈썹 언저리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 땀이, 어쩌면 더더욱 공포감을 심어 줬을 수도 있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탔다지만 그래도 통근전철이다. 수상쩍어하는 시선을 조금 더 참을까 하다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역 끄트머리로 가서 기침을 하니, 마스크는 했다손 치더라도 사람들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 몸을 돌리고 기침하는 데 등에 수십 개의 칼날이 날아와 박히는 느낌이다. 10여분 동안 기침하다 보니 온 몸의 힘이 빠졌다. 천천히 대합실로 들어가 한참을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서야 비로소 조금 괜찮아졌다.
다시 전철을 타고 사무실로 향한다. 역에 내리자마자 동네 병원부터 찾았다. 작년 9월 금연 직후 극심한 인후염을 앓았을 때 찾았던 조그마한 내과의원이다.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하자 그는 문진을 몇 번 하고 입안 여기저기를 비춰 보더니 가벼운 감기약을 처방해 준다. 내심 코로나19 검사도 받고 싶었지만 인플루엔자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열이 나지 않아서기 때문일 게다. 그렇게 그날은 넘어갔고, 나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일을 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고열까지 번지자 방 안에서 자택 격리
잘 때는 괜찮더니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온 몸이 뜨거웠다. 38.3도다. 무기력증과 근육통은 여전했고, 목 상태는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약을 먹었기 때문인지 기침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무섭다는 고열이 찾아오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를 격리시켰다. 내가 누워 있던 방은 문이 굳건히 닫혔고, 잠시 후 큰 아이 미우가 마스크와 고무장갑을 착용한 채 들어와서는 스프레이 분무기로 알코올 소독약을 여기저기 뿌리기 시작했다.
"언제 이런 것까지 다 사놨어?"
미우는 아무 말 없이 검지 손가락을 세워 마스크 위에 갖다 댄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그 때부터 나는 완전격리에 들어갔다. 열은 그대로였고,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문이 조금 열리면서 주먹밥과 된장국이 들어왔다. 아내한테 병원 예약 좀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토요일은 어느 동네병원이든 사람이 빽빽한지라 일단 해열제 먹고 버텨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일본적인 사고방식이다. 내가 코로나19에 걸렸을 지 모르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주말 동네병원에 가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맞는 말인데 서럽다. 몸도 아픈데 직설적인 저런 말까지 들어야 하다니. 물론 이 모든 건 선별진료소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아베 정권의 무대책 때문이다.
◇가족도 직장도 피하는 ‘코로나 차별’에 설움
그 다음 일요일은 어차피 휴진일이니 하루 종일 침대에 있었다. 37.5도로 열은 조금 내려갔지만 일본 정부 기준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 더 가까워졌다. 37.5도의 고열이 4일 이상이면 다른 증상이 없어도 우선적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를 받고 싶었다. 양성인지 음성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한 눈총을 받기 싫었다. 실제 우리 현장은 토요일도 정상출근이어서 내가 쉰다는 얘기가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를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처음엔 웃으면 아니라고 했는데 며칠 동안 그런 얘길 계속 들으니 이게 말로만 듣던 '코로나 차별'인가 싶었다. 몸은 아프고, 그런 말까지 듣고, 더구나 아이들까지 내 방 근처엔 얼씬도 안 하니까 이게 사는 건가라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월요일 아침 눈을 번쩍 뜨는데 몸이 한결 가벼웠다. 체온부터 재어보니 36.6도! 뭐야, 코로나 아니었잖아. 기쁜 마음에 방문을 활짝 열고 1층 거실로 내려가는데, 내 발소리를 듣던 아이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둘째 유나가 "잠깐! 아빠! 스톱!"을 외친다. 황급히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에 알코올 소독액 스프레이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몸에 뿌린다. 열이 내렸으니 코로나19는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유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증상자가 얼마나 많은 줄 몰라? 무조건 조심해야 해. 특히 아빠가 걸리면 밀접접촉자인 우리는 다 걸리는 거니까.” 또 다시, 아니 더 세차게 스프레이를 뿌렸다.
중요한 발주처 회의가 있어 회사로 출근했다. 기침도, 열도 없었다. 인후염만 좀 강해졌고, 무기력한 권태감은 여전했다.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오후부터 또 몸이 이상해진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바로 내과의원으로 갔다.
원장에게 주말 동안 몸 상태를 설명 하고 코로나 검사를 받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3월 16일이다. 그러자 원장은 하루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면서 “고열 현상이 이틀이었기 때문에 검사대상 요건이 안 된다”고 했다. 보건소에라도 가고 싶으니 소견서를 써달라고 했다. 소견서가 있으면 검사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소견서도 써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인플루엔자 검사는 받았다. 열이 났었기 때문인데 인플루엔자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감기 아니면 코로나19 인데 감기 때문에 이렇게 며칠간이나 고생한 적이 없다. 내 심증은 점점 후자 쪽으로 굳혀 갔다.
◇의료붕괴 우려, 웬만해선 검사 안 해주는 일본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검사를 안 해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결국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일간 자택에서 자가격리를 하며 회사를 쉬었다. 열은 없는데 몸이 계속 무기력하고 식은 땀이 난다고 하니까 아내는 자율신경기능이상이나 백혈병 계통이 아니냐고 겁을 줬다. 막내 유치원 졸업식에도 못 갔다. 3일간 원 없이 넷플릭스만 봤다. 때로는 검사 받지 못하는 분노의 심정을 담아 페이스북 포스팅에 몰두했다. 일거에 검사를 받으면 의료체계가 붕괴한다는데, 나는 검사 자체를 못 받았다. 검사 받지도 못했는데 의료붕괴가 온 셈이다.
그리고 3월 19일 금요일 아침 일주일 만에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까지 심하게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를 스쳐간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 전국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최근 트위터에 갑자기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건 과연 착시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미증유의 나날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박철현 작가
박철현 작가는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저널리스트를 비롯해 게임플래너, 술집 주인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다 현재는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네 명의 아이를 뒀다. 일본 생활 이야기를 담은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어른은 어떻게 돼’ ‘이렇게 살아도 돼’ 같은 에세이를 냈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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