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29)] 여행자에게 팬데믹이란 1편
2020년 3월 15일. 우리는 칠레 남부 킨차오 섬의 아차오라는 소도시에 있었다. 칠로에라는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안의 섬이다. 세상으로부터 숨기 좋은 곳이다. 꼭 보고 싶었던 ‘아차오 교회’는 닫혀 있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칠로에에서 가장 오래된 18세기 목조 교회다.
바닷가에 레스토랑 겸 숙소가 있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 캠핑은 포기했다. 우린 칠레에서 차를 구입하고 지붕에 탑재된 루프톱 텐트를 종종 활용하며 ‘반 캠핑’ 여행 중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머문 지 2개월 반,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며 파타고니아 대부분에 발자국을 남긴 상태다.
욕실이 포함된 방을 구했다. 짐을 방으로 옮기는데 주인이 여권을 보자 한다. 왜? 칠레에선 외국인 여행자가 자주 들락거리는 호스텔이 아닌 이상 여권 확인은커녕 이름조차 적는 일이 드물다. 현금 받고 ‘땡’이다. 게다가 여긴 변방 중 변방이 아닌가.
‘코로나 때문인가?’ 탕탕은 눈치 없이 기침을 했다. 어제 캠핑장에서 찬물로 샤워한 후 감기에 걸린 상태였다. 해명을 해야 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건 지난해 4월 초였다. 스탬프의 출국 날짜를 확인한 주인은 미안하다며 여권을 돌려주었다. 나도 미안했다. 그의 태도를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코로나 사태를 실감하는 첫 경험이었다.
여행은 계속됐다. 칠로에 섬에서 올라와 푸카트리우에라는 해변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칠레의 남서쪽 끝이다. 다음날 좀 더 북쪽으로 약 190km를 달려 니에블라에 닿았다. 역시 태평양과 마주한 세상의 끝이다. 이탈리아의 아말피처럼 간소한 소도시다. 초록을 머금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알록달록한 집들이 한가로이 밀려드는 파도를 응시하는 곳이다. 낙조는 마음에 새겨지듯 강렬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며칠 사이 우리의 아침은 부쩍 달라져 있었다. 눈 뜨면 느긋하게 복식 호흡을 하는 대신 코로나 뉴스를 검색했다. 이동 중에도 틈틈이 상황을 체크했다. 돌이켜보면 어리석게도 숫자에만 집착했다. 각 나라의 당일 확진자 수는 얼마인가? 3월 17일 칠레의 확진자는 75명에 불과했으니, 천정부지로 오르는 이탈리아 확진자 수에만 입을 쩍 벌렸다. 탕탕의 고국인 프랑스도 바짝 뒤쫓고 있었다. 그는 자국 뉴스를 통해 애당초 현황을 속인 정부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칠레 여행이 계속될 것임을 의심하진 않았다.
좀 더 내륙인 코나리페로 목적지를 잡았다. 제법 큰 도시인 발디비아를 지날 때 대로변에서 운전자가 열린 창문으로 소리쳤다.
“너도 여행 중이지? 국립공원 문은 다 닫았대. 난 당분간 이 근처에 있으려고.”
프랑스인인 그는 파타고니아를 중심으로 1년 여행을 계획 중이었는데, 결국 파타고니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리에게 인근 지역 상황을 알려주었다.
3월 18일, 칠레 대통령은 전국에 ‘국가 재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약국마다 출입자를 제한한 듯 긴 줄이 늘어섰다. 마스크를 쓴 이가 부쩍 눈에 띈 것도 이때다. 약국마다 손 소독제와 마스크가 없다는 문구를 내걸었다. 우기지 좀 말라는 듯 찍은 느낌표가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코나리페에 도착한 즉시 휴대폰에 코를 박았다. 본격적으로 상황 파악에 나섰다. 며칠 사이 칠레의 코로나 상황이 급변한 것 같다. 우리가 칠레 남부 피오르 해협을 건너는 선박의 마지막 탑승객이었다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알다시피 칠레는 길고 얇다. 태평양과 아르헨티나에 꽉 낀 모양새다. 산이 국토의 80%다. 빙식곡으로 피오르가 형성되고, 땅이 분리되는 사례가 잦다. 자세히 보면 파타고니아는 육지가 쪼개져서 뿌려진 형태다. 이 때문에 남부 피오르 지형의 푸에르토나탈레스와 푸에르토몬트 두 도시를 연결하는 국도는 뚝뚝 끊긴다. 도로만 이용한다면 아르헨티나 땅을 거쳐야 한다. 국경은 이미 닫힌 상태. 결국, 파타고니아 남부의 여행자는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우린 자체 격리에 들어가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날까지 3일 연속 이슬비에 젖은 텐트에서 선잠을 잤다. 편안한 침대에서 단잠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니, 노동에 가까운 장기간 여행 중 휴가도 없었다. 이 참에 쉬어가는 것도 좋겠지. 차분한 상황 판단도 필요했다. 다음 행선지는 푸콘이다. 활화산인 비야리카 화산으로 목숨 걸고 등반하려는 열혈 청춘에겐 성지다. 우리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호기심에 둘러볼 예정이었다. 일주일간 머물 요량으로 에어비앤비 숙소에 예약 요청을 보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 돌아온 답변은 당황스러웠다.
“안녕. 푸콘의 모든 여행자 서비스가 중단됐어. 호텔, 여행사, 레스토랑 모두 말이야. 당신을 받아줄 수 없게 되었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진짜? 정신 차리고 대안을 찾아야 했다. 푸콘에서 약 25km 떨어진 비야리카는 어떨까. 다행히 에어비앤비 예약이 확정됐고,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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