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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의 영화로운 사람] 흥행에 도취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살 뿐이다

입력
2020.03.27 04:30
수정
2020.03.27 15:17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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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준익 감독

※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이준익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준익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준익 감독은 20대 초반 아빠가 됐다. 대학을 그만 두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이력이 마땅치 않은 이에게 일자리를 내줄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울 중학동 한국일보 옛 사옥을 지나가다 무작정 편집국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미술 전공을 살려 신문 지면에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요량이었으나 취직이 쉽게 될 리 없었다. 2006년 1월 영화 ‘왕의 남자’가 한창 흥행하고 있을 때 한국일보사를 찾은 이 감독은 감회에 젖었다. 가진 것 없이 좌절의 나날을 보냈던 20대 초반 자신이 갑자기 떠올라서였다.

이 감독은 차량번호만 보고도 어느 정부부처 장차관 차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시절 세종로 정부청사 정문 경비원으로 몇 개월 일한 경험이 있어서다.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던 이 감독은 합동영화사 선전부에 일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디뎠고, 쭉 영화인으로 살아왔다.

영화인으로서 그의 삶은 지하와 성층권을 오갔다. 지하에 머문 시기가 더 길었다. 영화사 씨네월드를 차린 후 영화 수입과 제작 일을 했는데, 실패의 쓴맛을 자주 봤다. 돈만 바라보지 않아서다. 영화 수입을 할 때도 그만의 심미안이 작용하곤 했다. 세계적인 괴작이라 평가받는 멕시코 영화 ‘성스러운 피’(감독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를 국내 개봉시키기도 했다. 당연히 돈을 벌지 못했다. 감독이 되겠다는 욕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키드 캅’(1993)을 연출하며 감독이 됐다. 연출을 의뢰한 감독 10명이 손사래를 쳐 궁여지책으로 본인이 나선 거다. ‘키드 캅’은 흥행에 실패했고, 평단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영화 ‘황산벌’(2003)을 연출한 것도 ‘키드 캅’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황산벌’이 흥행에 성공하며 10억원대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왕의 남자’로 1,200만 관객을 모았다. ‘괴물’(2006)에 밀리기 전까지 국내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이었다. 이전 1,000만 영화 ‘실미도’(2003)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와 달리 ‘왕의 남자’는 제작비 100억원대 블록버스터가 아니었다. 수익률로 따지면 아직도 충무로 1,2위를 다툰다. 중국에서는 불법다운로드로 1억명이 봤다는 추정도 있다. ‘왕의 남자’로 대박의 여운을 오래 즐길 만도 했을 텐데, 이 감독은 바로 촬영에 나섰다. ‘라디오 스타’(2006)부터 ‘평양성’(2011)까지 거의 매년 연출작을 선보였다. 본인도 매년 영화를 만들었는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영화로 밥을 먹고 있으니 꾸준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작용해서 일 것이다. 이 감독은 “고스톱판은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알 수 없는데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생을 살며 몇 번의 성취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이 감독의 영화는 중심부보다 주변부 인생을 들여다 본다. ‘황산벌’에선 농사 짓다 전장에 끌려온 거시기(이문식)의 사연에 주목했고, ‘라디오스타’는 퇴물 가수와 매니저의 우정에 초점을 맞췄다. ‘왕의 남자’는 궁중암투에 휘말리는 광대들의 사랑과 설움을 그렸다. ‘소원’(2013)은 성폭력 피해 아동과 가족의 시련 극복기를 다뤘고, ‘동주’(2016)와 ‘박열’(2017)은 일제강점기 불우했던 조선 청년들의 신념과 패기를 소환했다. 무명 래퍼를 중심에 세운 ‘변산’(2018)은 제목이 아예 지방 면의 명칭이다. 후반작업 중인 ‘자산어보’에선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과 섬 청년의 우정을 그린다. 이 감독 영화 속 인물들은 삶에 치이고, 시련을 겪으면서도 꿈과 희망을 놓지 않는다. 잦은 부침을 겪으며 “좋아도 지나치게 기뻐 말고, 어려워도 지나치게 낙담 말자”는 인생관을 지니게 된 이 감독의 삶이 반영됐다.

이 감독의 영화는 관객에게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 감독은 “감독은 어려운 직업이 아니다”라고 종종 말한다. “스태프와 배우 말만 잘 들으면 영화는 좋아지기 마련”이라는 이유에서다. 주변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고,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려는 그의 작업 방식은 그의 영화 화법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 감독은 고교 졸업 후 영화계에 입문한 류승완(‘베를린’ ‘베테랑’ 등) 감독을 ‘스트리트 스마트’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오래 공부를 하며 똑똑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리에서 세상과 부딪히며 지식과 지혜를 얻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 감독도 스트리트 스마트에 속할 것이다.

“꿈이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 감독은 여전히 꿈을 꾼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위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런 꿈은 아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까지 친우들과 함께 바이크로 대륙을 횡단하고 싶어한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유희적으로 사는 이 감독의 삶의 태도와 그의 영화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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