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프리트 운젤트. 그는 독일의 출판사 ‘주어캄프’를 오늘의 빛나는 자리에까지 이끌었던 출판인이다. 1924년생인 그는 튀빙겐 대학에서 헤르만 헤세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 주어캄프 출판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35세가 되던 해 대표 자리에 올라 약 40년 동안 이 거대한 출판사를 이끌었다. 운젤트가 걸어온 길이 곧 주어캄프가 걸어온 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판 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적이 있다. “주어캄프가 어떤 출판사인지 말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어캄프에서 출판하는 것은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자를 출판합니다.”
주어캄프는 독일을 대표하는 출판사 중 하나이다. 출판이 무슨 올림픽 경기 같은 것도 아니니 어떤 출판사가 나라를 대표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어쩌면 값싼 수사일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책 문화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 출판사를 하나 고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많은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주어캄프를 꼽을 것이다. 물론 이는 주어캄프 책들의 이미지에 기인한 바 크다. 문고본 판형에 작은 글자들이 깨알처럼 박혀 있는 밀도 있는 텍스트의 배열, 그리고 장식적 디자인을 최대한 억제한 절도 있는 책의 이미지는 독일이라는 나라의 미적 감성과 썩 잘 어울린다. 응축되었으되 왜소하지 않은 책, 과장되지 않았으되 자기 목소리가 뚜렷한 책, 그것이 주어캄프 책들이 주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출판사가 차지하고 있는 상징적 앞자리는 무엇보다 화려한 필자 목록 덕분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들과 학자들이 대부분 여기서 책을 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거쳐 위르겐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대한 이름들이 주어캄프 책들의 표지 위에 당당히 새겨져 있다. 주어캄프 출판사 대표 운젤트는 단순히 책을 만들어서 파는 기업인이 아니었다. 그는 책이 아니라 저자를 출판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수십 명의 필자들과 꾸준하게 편지를 교환하면서 이 출판사를 독일 지성계의 중심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는 책의 내용에 대한 진솔한 토론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저자의 연구와 집필을 격려하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4년에 출간한 소설 ‘로마에서의 죽음’으로 당시 독일 문단의 격찬을 한 몸에 받은 볼프강 쾨펜은 그 후 오랫동안 차기작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운젤트가 30여 년에 걸쳐 그와 5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의 작업을 격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운젤트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쾨펜 선생님, 선생님이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세요. 선생님의 글은 정말이지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그까짓 60쪽, 100쪽, 아니면 200쪽, 그냥 써버리시죠. 얼마 되지도 않는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우신지요. 저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운젤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하면, 출판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책이라기보다는 저자이다. 서점에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우리의 손길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저 종이의 묶음들은 검은색으로 인쇄된 정보의 덩어리가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있는 탁월한 영혼들의 치열한 사유들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 단둘이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가 매력적이라면 이보다 더 멋진 여행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최근 우리 사회의 독서율에 대한 통계가 발표되었다. 유감스럽게도 하강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책이 처한 어려움과 관련해서 다양한 진단과 처방들이 있지만, 독자의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국내의 저자들이 적어지고 있다는 점도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모으고 있지 못하는 큰 요인 중의 하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이 책이 아니라 논문을 쓰는 일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평가의 객관성에 대한 요구가 점증하면서 학자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저서에서 연구논문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자연과학이나 공학뿐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에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단행본 저술을 교수의 임용 및 업적에 대한 평가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정책적 성과가 나오길 바란다. 좋은 저자가 좋은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이 좋은 독자를 만든다. 한 나라의 지식 문화는 좋은 저자와 좋은 독자가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유능한 연구자들이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것도 좋고 훌륭한 논문들을 많이 쓰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오롯이 담긴 좋은 책을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서점과 도서관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제들이 가장 성실하게 제시되고 가장 열렬히 논의되는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앞으로도 계속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손에 책을 쥐는 것은 결국 매력적인 저자 때문이다. 저자가 독자를 만든다. 우리에게 저자를 돌려달라.
김수영 철학박사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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