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가.”
22일(현지시간) 미국 과학전문매체 사이언스는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알레르기ㆍ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에게 이런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그럴 법도 한 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대응을 이끄는 파우치 소장은 연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는 정책에 맞서며 소신 발언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체구는 작지만 브리핑 연단에 서면 팩트에 기반한 상세한 설명과 침착한 태도로 정치 구호나 다름 없는 트럼프의 낙관적 견해를 논리로 격파했다.
트럼프가 어떤 인물인가. 미국 의회 수장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향해 거침 없이 “미쳤다(crazy)”는 폭언을 내뱉을 만큼 편가르기와 감정의 정치에 특화된 지도자다. 그런 트럼프도 자신의 의견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파우치 앞에선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지만 일단 듣습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방식과 스타일을 갖고 있죠.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파우치가 공개한 생존의 이유이다.
트럼프는 29일 내달 12일 부활절까지 경제활동을 정상화하겠다던 계획도 한 달 더 미뤘다. 역시 파우치를 비롯한 백악관 코로나대응 태스크포스(TF) 일원들의 격론을 거쳐 나온 판단을 따른 것이다. ‘경청(傾聽)’을 금과옥조로 삼는 미국 정가의 소통 시스템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남미의 어느 대통령은 이들과 정반대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경제회생을 주장하는 자신에게 루이스 엔히키 만데타 보건부 장관이 “멈추라”며 반기를 들자 “계속 비판하면 해고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권위에 기댄 대통령 한 마디에 감염병 주무부처 수장의 간곡한 호소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은 코로나19 초기대응과 방역의 모범사례로 외신의 칭찬 세례를 받고 있다. 방역당국의 신속ㆍ정확한 검사, 시민들의 법질서 준수, 그리고 의료진의 헌신이 어우러져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이겨 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혼신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건 늘 정치권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달 2일 “마스크를 사흘 정도 써도 괜찮다”는 말을 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당시 마스크 품귀 현상이 심각해 4ㆍ15 총선을 앞두고 비난의 화살이 여당으로 향하자 들끓는 민심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였으나 발언의 방법과 내용 전부 틀렸다. 시민들이 왜 정부의 마스크 정책에 분개하는지,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마스크를 자주 바꾸는 행위를 무지한 시민의식으로 둔갑시킨 그의 결론은 더 문제였다.
방역체계가 완성돼 가고 마스크 대란도 차츰 잦아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도가 아니다. 파우치는 사이언스 인터뷰에서 “백악관과 상대하려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이나 말해야 하고, 그래야 일이 된다”고 했다. 국가적 위기가 커질수록 중요한 위정자의 덕목은 ‘인내’와 ‘경청’이다. 여당 대표의 현실 인식이 잘못됐을 때 “낙천을 무릅쓰고 적어도 네 번 말해주는” 그런 정치인이 보고 싶다. 들어야 산다.
손성원 국제부 기자 sohns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