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발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밀려 텔레그램 비밀방 사건의 담당 재판부가 교체되자 사법부가 동요하고 있다. 여론에 따라 재판부까지 교체되는 상황에서 재판의 독립을 우려하는 지적과 사법부의 자업자득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다.
지난달 30일 서울중앙지법은 A군 담당 재판부를 형사20단독 오덕식(52ㆍ27기) 부장판사에서 형사22단독 박현숙(40ㆍ37기) 판사로 재배당했다. 법원은 오 부장판사의 재배당 요구에 따라 재판부 교체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법원 안팎에서는 고(故) 구하라 씨의 전 남자친구 최종범 씨에게 집행유예를, 고(故) 장자연씨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던 전 조선일보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오 부장판사의 자격박탈을 요구하는 청원이 빗발치는 시점이었다. 오 부장판사의 자격박탈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는 40만명이 동의하기도 했다.
재판부 교체를 두고 법원 내부에선 “오 부장판사 스스로 재판을 포기한 형태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청원 때문에 진행 중인 재판이 흔들리는 선례가 만들어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청원에서 법관의 교체나 파면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은 많았지만 그 결과 재판 진행 상황이 바뀐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부분의 판사들은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헌법이 보장하는 법관의 독립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헌법 103조에서 말하는 법관의 독립이란 행정ㆍ입법부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대중의 압력으로부터의 독립도 포함된다는 설명이다. 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다수의 눈치를 보는 법관들이 많아지면 소수의견이나 진보적인 판결이 나올 수 없다”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판사들도 “판결 자체에 대한 비판은 감수하겠지만,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한 공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법부가 자성해야 한다는 전향적인 의견도 있다. 사법부가 국민의 목소리에 무심했던 전례로 인해 불신이 쌓였고 그게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오 부장판사 개인에게 집중 포화됐다는 분석이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판결문을 전면 공개해 판결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받는 게 법관의 독립이라는 가치를 지키면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판사는 판결로 논증하고 국민은 논리의 빈틈을 찾는 공론장을 통해 사법부가 건강하게 존속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윤주영 기자 ro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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