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비자 민주주의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소비자 민주주의가 성립될 때 그 정치가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구매자가 따로 없기 때문에 정치의 소비자를 유권자라고 합니다. 서비스를 향유하는 사람이 서비스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유권자로서 선거와 투표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말이다. 이 때만 해도 ‘소비자 민주주의’라는 말은 한갓 ‘비유’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정권에 들어와서는 이 비유는 현실이 되었다.
◇네트워크에서 빅데이터로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2008년 미국의 대선에서는 모든 것이 ‘인터넷’이었다. 전국에 깔린 인터넷망이 아래로부터 유권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는 새로운 유세방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2002년에 벌어졌던 그 일이 뒤늦게 미국 땅에서 재연된 셈이다. 당시 오바마 캠프는 탁월한 감각으로 인터넷을 활용한 유세에서 상대 캠프를 압도했고, 그것이 그 해 선거의 승패를 갈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012년 오바마가 재선에 나섰을 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때는 모든 것이 ‘빅데이터’였다. 오바마 캠프는 천문학적 액수가 들어가는 TV광고전 외에 빅데이터를 활용해 지역마다 계층마다 다른 유권자들의 니즈를 파악하여 그 지역이나 계층에 따라 차별화한 공약을 내세우는 세밀한 홍보전을 펼쳤다. 기업에서 활용하는 마케팅 기법을 그대로 선거전에 도입한 것이다. 이번에도 승리는 오바마의 것이었다.
이 변화의 바탕에는 어떤 기술적 필연성이 깔려 있다. 인터넷의 특징은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에 기초한 수평적 네트워크에 있다. 그것이 정당의 수동적 지지자들을 능동적 참여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소비자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결국 정치가 공급자(정당인) 중심에서 소비자(유권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표명이었던 셈이다. 그 정권이 ‘참여정부’를 자처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에 열광했지만, 결국 인터넷의 주인이 된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검색엔진이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구글신’에게 데이터를 갖다 바치는 존재가 되었다.
먼저 기업들이 이 데이터들을 마케팅에 활용했고, 정당들도 곧 기업의 마케팅 기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로써 인터넷이 정치의 ‘주체’로 세운 유권자들은 빅데이터를 통해 다시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케팅으로서 정치
사실 정치적 마케팅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정치권에서도 늘 ‘여론조사’라는 이름으로 시장조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적 여론조사가 공적 사안에 대한 유권자의 의견을 물었다면, 빅데이터를 활용한 여론조사는 매출(득표)을 위해 유권자들의 사적 니즈를 파악하는 판매전략에 가깝다. 물론 이 현상을 무조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정치가 소비자의 다양한 니즈에 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치와 시장의 융합. 문제는 정당과 기업의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데에 있다. 정당의 목적은 ‘공공선’에 있다. 반면 기업의 목적은 ‘사익’에 있다. 유권자와 소비자도 성격이 다르다. 유권자는 자신의 표가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데 쓰인다는 믿음에서 표를 던진다. 반면 소비자가 물건을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적’ 필요나 취향의 문제다. 물건을 고를 때 소비자는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만을 생각할 뿐이다.
물론 공적 소비도 존재한다. 가령 돈을 좀 더 내더라도 제3세계 사람들의 노동에 제 값을 지불하는 기업의 신발을 사는 ‘착한 소비’라든지,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서 일본제품을 보이콧하는 ‘불매운동’ 등은 원래 ‘사적’ 성격을 가진 소비에 ‘공적’ 성격을 부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권자가 소비자가 될 때는 그와는 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공적 활동이어야 할 정치가 사적 용무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정치의 무분별한 마케팅화는 결국 정치과정을 시장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얼마 전 민주당에서는 비례대표 선거 시뮬레이션에 기초해 별도의 위성정당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의 근거는 업계 매출1위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판매전략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명분이나 도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저 경쟁사에 맞서 매출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이해타산이 있을 뿐이다. 공당이 일종의 사기업이 되어 버린 셈이다.
◇장사가 된 정치
정치가 마케팅이 되면 정당은 기업이 된다. 기업의 목적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 있다. 때문에 정당이 기업이 되면 ‘공공선’은 더 이상 활동의 목적이 아니게 된다. 최근 민주당의 행태가 우리를 당혹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정당들은 예나 지금이나 ‘공공선’을 빙자하여 당리당략만 추구해 왔지만, 빙자할 그 ‘공공선’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국 사태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그것의 노골적 폐기다.
‘팬덤정치’도 알고 보면 이 마케팅 정치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유권자는 자신을 국가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해 ‘공익’을 기준으로 사유한다. 때문에 자신의 지지정당이 공공선을 거스르는 행위를 할 경우 지지를 철회하거나 지지 강도를 낮춘다. 반면 자신을 정치서비스의 소비자로 인식하는 팬덤은 자신의 팬-객체가 공공선을 파괴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외려 지지의 강도를 높인다. 소비는 ‘사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당이 기업으로 행동하고 유권자가 소비자로 행동하면, 당연히 소비의 ‘사적’ 성격이 ‘공적’ 정치과정을 결정하게 된다. 청문회 과정에서 공공선을 대변했던 현직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반면 선거개입 사건에 연루된 경찰인사, 조국을 위해 ‘개싸움’을 벌었던 변호사, 위조 인턴증명서로 기소 당한 전직 공직기강비서관, 부동산투기로 물러난 전직 청와대 대변인은 공천을 받았다. 이대로라면 당선까지 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는 사적 행위이기에 남이 뭐를 사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가 불량품을 사더라도 내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 정치는 그와 달라 공적 성격을 띤다. 즉 정당은 세금으로 운영되기에 내가 사지도 않은 물건의 대금이 내게도 청구된다. 그래서 투표는 ‘공적’ 활동이어야 하나, 정치의 마케팅화는 이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불량품의 구입을 강요 당하거나, 남이 한 소비의 대금을 함께 치르며 좌절하게 된다.
◇용역으로서 정치
정치의 마케팅화는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브랜드 충성도’(brand loyalty)로 바꾸어 놓는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더 이상 ‘노무현 정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노무현’이라는 브랜드뿐이다. 민주당을 맴도는 두 위성정당(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의 비례후보들이 노무현의 묘역을 찾은 것은 브랜드 사용권을 얻기 위한 경쟁으로 볼 수 있다. 사용권이 확보되면 당연히 브랜드를 이용한 요란한 마케팅이 시작된다.
심지어 남의 브랜드를 도용하기까지 한다. 열린민주당에서는 광고에 노회찬의 사진을 실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회찬 정신’이 아니라 ‘노회찬’이라는 브랜드. 그 브랜드는 물론 정의당 표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마케팅을 통해 노회찬은 졸지에 조국이 되었다. 둘 다 정치검찰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6411번 버스를 탔던 노회찬은 그렇게 ‘검찰개혁’의 미명 하에 권력의 비리를 덮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집권말기에 노 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한탄한 바 있다. 이제는 정치 자체가 시장으로 넘어갔다. 유권자가 정치서비스 시장의 소비자로 행세하는 곳에서는 당연히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 등장할 수가 없다. 그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수동적으로 대중의 니즈에 영합하는 무색무취의 정치인, 아니면 능동적으로 대중의 니즈를 조작할 줄 아는 포퓰리스트 선동가뿐이다.
마케팅 정치는 공적 사안(res publica)을 사적 용무(res privata)로 바꾸어 놓는다. 공적 활동으로서 정치가 사적 소비행위로 사라질 때 위기에 처하는 것은 공화국(republic)의 이념이다. 지금 우리는 그 위기의 불길함 조짐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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