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중앙TV가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부지구 항공 및 반항공사단 관하 추격습격기 연대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밝은 표정으로 부대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김 위원장의 사진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뒤편 ‘미그-29(MIG-29)’ 전투기 옆면에 큼지막하게 부착된 두 개의 붉은색 글자판이다.
글자판을 자세히 살펴보면,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주체 77(1988)년 8월 17일에, 김정일 김정은 부자는 주체 97(2008)년 12월 27일에, 그리고 김 위원장이 주체 101(2012)년 1월 30일 이 비행기를 보아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날 보도된 사진뿐 아니라 과거 비행훈련 사진들을 보면 다른 전투기에도 이 같은 글자판이 적지 않게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자판이 한 개인 경우도 있고 적혀 있는 내용도 각기 다르지만, 김일성 삼부자의 세습 독재 체제를 옹호하고 군부대의 충성을 강요하는 상징물인 점은 동일하다.
원래 없던 글자판이 새로 생긴 경우도 있다. 김 위원장은 2014년 10월 다수의 공군 부대를 연합해 실시한 ‘검열비행훈련’을 참관하고 직접 전투기에 올라 조종사들을 격려했다. 당시 보도된 사진에서 김 위원장이 탑승한 ‘550’번 미그-29 전투기에는 글자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2일 이 550번 전투기의 이륙 장면이 담긴 사진을 자세히 보니 조종석 옆면에 붉은색 글자판 한 개가 붙어 있다.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글씨를 식별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경애하는 최고지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주체 103(2014)년 10월 30일 보아주신 비행기’라는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공군은 최근 몇 년 사이 전투기에 위장색을 도입해 왔다. 기체 상부는 회색, 하부는 하늘색으로 칠하는 식이다. 북한 공군의 주력기인 미그-29기의 경우 위장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 같은 도색은 물론 붉은색 인공기 라운델(표식)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 후미 아래쪽에 부착했다. 그러나 김일성 삼부자의 흔적만은 눈에 가장 잘 띄는 위치에 새빨간 색으로 대문짝만 하게 붙여 놓은 점은 아이러니다.
북한 전투기에서 눈에 띄는 삼부자 독재 체제의 흔적은 붉은색 글자판뿐만이 아니다. 전투기에 따라 왼편에 ‘로력영웅 금메달’ 문양을, 오른편엔 ‘김일성-김정일주의 청년동맹’ 마크를 부착한 경우가 적지 않다. 로력영웅은 김일성이 혁명과 건설에 크게 이바지한 일꾼에게 주던 영예의 칭호로 지금까지도 수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김정일주의 청년동맹은 북한 주민 중 만 14세부터 30세까지 모든 청년 학생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가장 큰 규모의 근로 및 사회단체다. 이 단체의 마크가 왜 전투기에 부착돼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김일성 삼부자의 독재 체제 선전이 전술 운용보다 중요한 ‘절대 가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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